대한민국/100년전 우리는

[63] '조연(助演)'이 된 순종의 서남순행

namsarang 2010. 3. 17. 23:20

[제국의 황혼 '100년전 우리는']

[63] '조연(助演)'이 된 순종의 서남순행

  • 박기주 성신여대교수·경제학

1909. 8. 29.~1910. 8. 29.

'1월 6일 황제가 경상도를 순시하여 대구, 부산, 마산포에 이르렀다. 궁내부대신 민병석, 군부대신 이병무 등 여러 신하와 이토 히로부미가 황제를 모시고 따라갔다.'(대한계년사) '1월 27일 황제가 평안도를 순시하여 의주에 이르렀다. 2월 4일 대궐로 돌아왔다.'(〃)

헤이그 사건으로 고종이 퇴위하고 순종이 즉위하였다. 순종은 즉위 1년여 만인 1909년 벽두에 2주에 걸쳐 일제가 깔아놓은 철도를 따라 경상도와 평안도 황해도 일대를 돌아본다(개성 망월대를 찾은 순종). 소위 '서남순행'이다. 당시 궁내부 서기관이던 일본인 곤도(權藤四郞介)는 "조선 500년 동안 병란이 일어나 몽진을 할 때 외에는 어가가 궁문 밖을 나온 적이 없다는 오랜 관습을 깨고 단행하신 일이다. 게다가 이 일은 매우 신속하게 진행되어 사람들의 마음에 아주 신선하게 다가왔다"(대한제국황실비사)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 서남순행은 이토가 꾸미고 '주연'한 이벤트에 불과했다. 서남순행에 대한 곤도의 기억은 이토에 대한 칭송으로 가득하다.

▲ 개성 망월대를 찾은 순종
"매일 직접 그의 풍모를 접하고 그의 담론을 들을 수 있었다. 그러는 동안 이토 공작이 위대한 인격자이며 생사를 초월한 불세출의 정치가라는 생각이 들었으며, 특히 인상 깊게 느낀 것은 평북 선천에서 경험한 이토 공작의 영웅적 태도이다. 선천은 반일사상의 중심 지역이었다. 이토 공작은 순행 중 의도적으로 이곳에 내려 운집한 사람들에게 연설을 하였다. 언덕 위에 서서 군중들을 위엄과 자애로움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고종의 강제 퇴위 이후 민심은 흉흉해져 있었다. 이토는 이런 민심을 달래고, 또한 일본이 빈사상태에 놓인 조선을 보호할 수밖에 없음을 역설하기 위해 순종을 '조연'으로 대동한 것이었다. 황제를 우습게 본 것은 이토만이 아니었다.

▲ 송병준
"송병준이 황제의 열차 안에 있다가 술에 취해 열차 내 한편에 있던 궁녀방으로 곧장 들어갔다. 시종무관 어담이 그 무례한 짓을 막자, 송병준이 크게 노하여 주먹으로 어담을 때렸다. 또 차고 있던 칼을 빼어드니 어담도 칼을 빼어들었다."(대한계년사) 송병준이 무엄하게도 황제 앞에서 칼을 뽑아 시종무관과 다툼을 벌였다는 사실이 온 나라에 퍼졌다.

곤도는 "전하가 이르는 곳마다 백성을 살피셨고 효자 효부를 표창하셨고 홀아비와 과부를 위로하셨다. 전하가 타신 열차가 거쳐 가는 지역 가운데 환영 나온 한 노인이 눈물을 흘리며 성덕에 감격하는 광경은 극적이었다"고 했지만, 그 눈물은 망국의 비운을 코앞에 둔 조선 황제가 일본군대와 매국대신들에 옹위되어 가는 모습을 보고 흘리는 분루(憤淚)였을 것이다.

민심은 냉랭했다. "황제의 서도순행에 봉영예절을 준비하기 위해 개성군에서 민회를 조직하였는데 이건혁, 박우현, 이면근 3인이 발의하기를 '집집마다 문 앞에 한일 양 국기를 같이 달자' 하기로, 여러 인민들이 일제이 가로되, '한국 황제폐하를 봉영하는 날에 일본 국기가 어디 당하느냐'하고 일장풍파가 일어나서 곧 폐회하였다더라."(국민신보 1909.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