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100년전 우리는

[65] 궁전을 헐어 동물원을 짓다

namsarang 2010. 3. 19. 18:11

[제국의 황혼 '100년전 우리는']

                 [65] 궁전을 헐어 동물원을 짓다
 
1909. 8. 29.~1910. 8. 29.
 
                                                                                             권영민 서울대교수·한국문학

대한매일신보는 1909년 11월 2일 '구경났군'이라는 제하의 기사에서 '창경궁 홍화문을 개방하여 그동안 개원을 준비했던 박물관과 동물원 식물원의 일반 관람이 11월 1일부터 시작되었다'고 보도하고 있다. 관람료는 어른 10전이다. 당시 신소설 책 한 권이 15~20전 정도였던 것을 생각하면 입장료가 그리 비싼 편은 아니다. 술 취한 사람, 의복이 누추한 사람, 미친 사람은 입장 불가라고 한다.

▲ 1984년 창경궁으로 복원되기 전 동물원의 모습
창경궁 안에 동물원과 식물원을 만드는 일은 조선 통감부의 설치(1906) 이후 궁내부(宮內府)에서 계획한 것이다. 당시 궁내부의 차관이 된 일본인 고미야(小宮三保松)는 제실(帝室) 재산정리국과 어원(御苑) 사무국을 총관하면서 성안의 여러 궁궐을 헐어 없애고 황제의 무료함을 달랜다는 명목으로 동식물원을 건설한다는 계획을 세우게 된다. 당시 창경궁은 철종(哲宗) 이래 약 70년 동안 별로 쓰이지 않아 폐궁과도 같았는데, 창덕궁에 인접해 있어 이를 정비하여 황실에서 활용할 수 있게 하자는 명분을 내걸었던 것이다. 일본인 곤도 시로스케(權藤四郞介)는 '대한제국황실비사'에서 '이토 공작이 궁중 숙청작업을 단행함과 동시에 국왕의 은혜를 백성들에게 보여주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궁전의 조영과 동식물원을 신설할 것을 진언했다'고 기록했다. 하지만 이는 대한제국의 국권과 황실의 권위를 훼손하기 위한 음모였다고 할 수 있다.

창경궁의 동식물원 건립 공사는 1908년 봄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된다. 명정전과 남북 행랑 및 주요 전각을 박물관으로 하고 남쪽의 보루각(報漏閣) 일대에 동물원을, 북쪽 춘당대(春塘臺)에는 식물원을 만든다는 것이다. 공사가 시작되면서 화려하고 웅장했던 전각 행랑 문루 궁장이 무참히 헐려나가자, 대한매일신보는 1908년 3월 6일 '동물원을 수축할 차로 동궐(창경궁) 선인문 안에 있는 전각을 몰수히 허는데 그 중에 천여 년 된 옛 전각도 또한 훼절한다더라'하며 안타까움을 표시한다.

공사가 진행되던 1년 반 동안 전시될 동물과 식물의 수집에 거국적으로 나선다. 각도 관찰사에 진귀한 동물과 식물을 수집해 올리라는 지시가 내려지고, 살아 있는 범이 잡혀 왔다거나 중국에서 코끼리(1984년 창경궁으로 복원되기 전 동물원의 모습)를 사오게 된다는 소식도 전해진다.

그러나 동물원 식물원이 개원하자 일부 신료들이 "왕조의 유서 깊은 궁궐 안에 상민들이 흙발로 드나드는 일은 불가하다" 며 일반 공개를 반대한다. 순종 황제는 '명군은 백성과 함께 즐긴다'라는 옛글을 들어 신료들을 타이르고, 결국 궁안에 상민출입이 임의롭지 못함을 들어 창경궁(昌慶宮)을 창경원(昌慶苑)으로 격하함으로써 개방의 명분을 삼게 된다. 창경원 개원식에 1000여명의 내외빈이 초대되고, 순종은 일본인들이 지어준 모닝코트를 입고 나타난다. 동물원과 식물원은 장안의 화제가 되어 연일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궁궐은 더이상 신성한 황제의 상징물이 아니라 사람들의 놀이터로 전락하였으니 일본의 의도가 들어맞은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