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100년전 우리는

[67] '기업경영과 교육의 선구자' 이용익

namsarang 2010. 3. 21. 14:54

  [제국의 황혼 '100년전 우리는']

[67] '기업경영과 교육의 선구자' 이용익

  • 조익순 고려대명예교수·회계학
                  조선 말기 정치가 겸 개혁가
                          이용익(李容翊)

1909. 8. 29.~1910. 8. 29.

이용익(李容翊)은 조선 말기 정치가 겸 개혁가이다. 그는 흔히 '친러파의 수령'으로 불리지만, 실제 그의 능력과 파란만장한 인생역정을 정확히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는 1854년 함북 명천에서 출생했다. 그의 출신에 대해 '북쪽 오랑캐의 피를 이어받아 무식하고 예의를 모르는 사람'이라고 폄하하는 주장이 있지만, 공식기록인 '남병영기사'를 보면 그는 전주 이씨 완풍대군파로 양반 출신이다.

이용익이 고종 때 관계(官界)로 진출한 것은 임오군란 때 여주로 피란 간 민비를 도와준 것이 계기가 되었다. 첫 관직인 함경도 단천부사 시절 그가 관할하는 광산에서 징수한 세금이 전임자의 10여배나 되어 '광산경영의 귀재'로 인정받은 뒤, 전국 광산의 관리책임자로 승진한다.

이용익의 경영철학은 양반들의 '책상머리 경영'과 달리, 발로 뛰며 확인하는 '현장경영'이었다. 서울에서 개성까지 직접 오가며 홍삼 제조를 감독하고 세금징수를 독려하는가 하면, 일본인들의 인삼밭 도적질을 외교력으로 저지하는 수단도 쓸 줄 알았다. 고종의 신임을 얻은 그는, 지금의 조폐공사인 전환국 초대국장과 철도사(鐵道司)의 책임자로 임명되어 두 기관을 본궤도로 올려놓고, 1899년 황실 재정을 총괄하는 내장원경(內藏院卿)으로 발탁되었다.

고종은 원래 고위관직자를 한 자리에 오래 두지 않았으나, 이용익의 경우 일본으로 납치되는 1904년까지 내장원경직을 유지하였고, 지금의 내무부장관, 지방법원장, 헌병사령관, 감사원장을 비롯하여 서북철도국총재, 군부대신까지 겸직하였으니 다른 사람의 시샘을 받을 만했다.

이용익은 기업이나 정부조직의 운영능력이 뛰어났을 뿐 아니라, 열강 세력을 교묘히 이용해 독립을 유지하려는 의지도 강했다. 일각에서 그를 '친러파'로 치부하지만, 그는 주한 일본군 총사령관 하세가와(제2대 조선총독)와도 절친했다. 러일전쟁이 일어나면 조선이 전쟁터로 변할 것을 우려하여 밀사를 해외로 파견해 '중립국 선언'을 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그는 또 일본으로부터 인쇄기기와 외국도서를 구입해 지식을 보급했으며, 보성전문학교(고려대학교의 전신)와 보성중학을 설립해 교육을 통한 자주독립을 꾀했다. 우리은행의 전신인 대한천일은행을 설립해 전통 회계방식으로 결산서를 남긴 것은 귀중한 자료다.

이용익은 1905년 9월 14일 이후 종적이 모호해지는데, 고종이 일본의 '강제병합 시도의 부당성'을 국제사회에 알리기 위해 그를 밀사로 파견하였다는 설이 있다. 1907년 1월 12일 그는 러시아에서 생을 마쳤다. 고종은 그에게 '충숙'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독립운동가 윤효정은 '풍운한말비사'에서 "이용익은 한평생 그만한 재정권을 가지고 황실재용을 독단하야 지냈으니 응당 기천 기백석의 추수가 있으리라 추측하였는데, 그 자손을 위한 경영이라고는 공공무여(空空無餘)한 것은 세인이 모두 다 알고 있는 바이며, 보성전문을 위시하여 각 학교에 수십만 원을 비(費)하였다"라고 적고 있다. 혼란한 시대의 충신이자 교육의 선각자였던 그의 공적이 널리 알려지지 않은 것이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