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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2월 8일자 황성신문에는 '화폐와 인민 비례'라는 제목 아래 다음의 기사가 실렸다.
"우리나라에 통용하는 화폐의 총액은 은행권 1300만원, 보조화 416만원, 총액 1716만원인데, 엽전 잔액을 합하면 약 2000만원이라. 이것을 전국 2천만으로 나누면 1인에 1원에 불과한 즉, 일본의 1인 10원 비례에 비하면 10분의 1에 불과하다더라."
한일 간 이러한 화폐경제화의 격차는 문호개방 이후에 발생한 것은 아니다. 일본의 이와하시 마사루(岩橋勝) 교수의 추계에 의하면, 1800년경 일본의 1인당 화폐 보유량은 중국에서도 경제가 비교적 발달한 복건성(福建省)의 2배이고 한국의 10배에 달하였다. 이 격차는 고액권의 유통량에 기인하였다. 19세기 한국에서 활발히 사용된 어음을 고려하면, 한일 간 격차가 다소 줄어들 수는 있다.
- ▲ 우리나라에 통용하는 화폐의 총액은 은행권〈위 사진〉, 엽전〈아래 사진 왼쪽〉,19세기 한국에서 활발히 사용된 어음〈아래 사진 오른쪽〉.
당시 일본의 화폐경제화는 아시아에서는 가장 진전되었고 유럽의 선진지역과 대등한 수준으로 보인다. 전근대 한국에서는 화폐경제의 전개가 심한 기복을 가진 반면, 일본에서는 12세기경부터 화폐경제가 착실하게 성장한 결과, 양국 간 격차가 18세기에 이미 현격하게 벌어졌던 것이다.
이런 화폐경제화의 격차가 경제력 격차를 그대로 반영하지는 않는다. 1800년경 일본의 1인당 소득은 한국보다 20∼30% 높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 격차는 이후 확대되어 1910년경에는 2배 정도로 벌어졌다. 15세기까지는 일본은 문명적으로 조선을 앞지르지는 못하였으나, 시장·화폐경제의 착실한 발전으로 경제, 나아가 문명에서 조선보다 빠른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조선 후기에 일본을 잘 아는 소수의 학자들은 일본이 학문적으로 조선을 앞지르게 되었다고 보았다. 정약용이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런 내용을 엿볼 수 있다.
"일본이라는 나라는 원래 백제에서 책을 얻어다 보았는데 처음에는 매우 몽매하였다. 그후 중국의 절강 지방과 직접 교역을 트면서 좋은 책을 모조리 구입해갔다. 책도 책이려니와 과거를 보아 관리를 뽑는 그런 잘못된 제도가 없어 제대로 학문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지금 와서는 그 학문이 우리나라를 능가하게 되었으니 부끄럽기 짝이 없는 일이다."
1880년 제2차 일본시찰단의 보고 이후 한국은 일본을 근대 문명의 도입 창구로 삼았다. 이후 일본이 한국보다 선진문명이라는 인식이 사회적으로 확산되었다. 화폐액으로 양국 간 격차를 드러낸 황성신문의 기사는 그러한 인식의 산물이었다.
돌이켜 보면 기원 전후의 수세기간에 걸쳐 일본은 한국을 학습하여 한국 따라잡기(catch up)에 성공하였다. 16세기경부터 일본은 조선을 앞서기 시작하여 그 격차가 갈수록 확대되었다. 한국이 일본을 학습한 것은 1880년부터이며, 1960년대 이후 한국의 고도성장기에 그 격차가 축소되기 시작했다. 21세기에 한국은 '일본 따라잡기'에 성공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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