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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효(젊은 시절 모습).
"궁내부 대신 박영효씨가 경무청에 갇힌 말을 들은즉, 재작야에 일본 황태자가 한국 황태자께 대리(代理) 되신 치하를 신(新)황제 되신 양으로 전보하였는지라, 총리대신 이완용씨는 신황제 되신 자격으로 답(答)전보하자 하고 궁내부 대신 박영효씨는 가로되, '황태자 전하께서는 대리하실 뿐이요, 위(位)는 받지 아니하였으니 어찌 황제로 답전보하리오. 만만불가하다' 하되, 이완용씨가 기어이 고집하고 듣지 아니하여 일장 힐난하다가 박영효씨가 분격함을 이기지 못하고 퇴궐하여 집으로 갔다더라."('대한매일신보', 1907. 7. 23.)
얼마 안 되어 박영효(1861~1939)는 고종 양위에 찬성한 대신들을 암살하려 했다는 혐의로 일본 순사들에 붙잡혀 제주도로 유배된다. 이 사실만 보면 박영효는 고종에 매우 충성스런 신하인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고종 재위 기간 3차례 역모를 도모했고, 2차례에 걸쳐 22년간 해외에서 망명객으로 떠돌았다.
얼마 안 되어 박영효(1861~1939)는 고종 양위에 찬성한 대신들을 암살하려 했다는 혐의로 일본 순사들에 붙잡혀 제주도로 유배된다. 이 사실만 보면 박영효는 고종에 매우 충성스런 신하인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고종 재위 기간 3차례 역모를 도모했고, 2차례에 걸쳐 22년간 해외에서 망명객으로 떠돌았다.
- ▲ 박영효(일가족 모습. 가운데 아이를 안고 있는 이가 박영효)
박영효(젊은 시절 모습)는 12세 때 철종의 유일한 혈육인 영혜옹주와 혼인해 금릉위(錦陵尉)에 봉해졌다. 혼인한 지 석 달 만에 영혜옹주와 사별하지만 '철종의 부마'라는 신분에 평생 자부심을 느꼈다. 그는 1870년대 중반부터 박규수의 집을 드나들며 개화사상을 익혔다. 1884년 김옥균 등과 함께 일으킨 갑신정변이 실패하자 일본으로 망명한다. 일본에서 한국과의 외교분쟁을 우려해 자신들을 박대하자 그는 서광범·서재필 등과 다시 미국으로 망명한다. 서광범과 서재필은 노동을 하며 생활비를 벌었지만, '철종의 부마' 박영효는 "양반이 아무리 하더라도 노동을 할 수 없다. 일본에서는 내가 양반인 것을 알아줌으로 설마 천역(賤役)을 아니 하게 될 것이다"(김도태, '서재필 박사 자서전')며 7달 만에 일본으로 돌아간다.
박영효는 1894년 친일내각이 조직되자 10년 만에 복권되고 내무대신에 임명돼 갑오개혁을 주도한다. 그러나 이듬해 7월 자신의 측근을 무리하게 요직에 기용하려다 '왕비를 살해하고 정부 전복을 획책한다'는 누명을 쓰고 다시 일본으로 망명한다. 1900년에는 일본에 망명 중인 동지들을 규합해 정부를 전복하고 의화군(의친왕)을 국왕으로 추대하려는 쿠데타를 계획하다가 발각돼 궐석재판에서 교수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1907년 6월, 12년 만에 복권돼 궁내부 대신에 임명된 그가 이완용과의 권력투쟁에서 밀려 1년간 제주도에 유배되었을 때, 현지 주민들에게 감귤 농사 기술을 전수하기도 했다.
몇차례 개혁시도가 좌절된 뒤 박영효(일가족 모습. 가운데 아이를 안고 있는 이가 박영효)는 철저히 일본에 협력한다. 강제병합 이후 후작 작위를 받고 조선귀족회 회장, 중추원 의장, 일본귀족원 의원 등을 지냈다. 당시 그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이광수와 인터뷰에서 박영효는 한국의 미래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나는 조선의 전도(前途)에 대해 비관하지 않소. 왜 그런고 하면 앞으로 더 망(亡)할 나위는 없으니까. 조금씩이라도 낫게 될 것밖에는 없으니까."('동광' 1931년 3월호)
박영효는 1894년 친일내각이 조직되자 10년 만에 복권되고 내무대신에 임명돼 갑오개혁을 주도한다. 그러나 이듬해 7월 자신의 측근을 무리하게 요직에 기용하려다 '왕비를 살해하고 정부 전복을 획책한다'는 누명을 쓰고 다시 일본으로 망명한다. 1900년에는 일본에 망명 중인 동지들을 규합해 정부를 전복하고 의화군(의친왕)을 국왕으로 추대하려는 쿠데타를 계획하다가 발각돼 궐석재판에서 교수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1907년 6월, 12년 만에 복권돼 궁내부 대신에 임명된 그가 이완용과의 권력투쟁에서 밀려 1년간 제주도에 유배되었을 때, 현지 주민들에게 감귤 농사 기술을 전수하기도 했다.
몇차례 개혁시도가 좌절된 뒤 박영효(일가족 모습. 가운데 아이를 안고 있는 이가 박영효)는 철저히 일본에 협력한다. 강제병합 이후 후작 작위를 받고 조선귀족회 회장, 중추원 의장, 일본귀족원 의원 등을 지냈다. 당시 그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이광수와 인터뷰에서 박영효는 한국의 미래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나는 조선의 전도(前途)에 대해 비관하지 않소. 왜 그런고 하면 앞으로 더 망(亡)할 나위는 없으니까. 조금씩이라도 낫게 될 것밖에는 없으니까."('동광' 1931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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