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100년전 우리는

[68] '거리의 신문낭독'과 신문종람소

namsarang 2010. 3. 22. 22:02

[제국의 황혼 '100년전 우리는']

 

[68] '거리의 신문낭독'과 신문종람소

 

  • 정진석 한국외국어대명예교수·언론정보학
1909년 출간된 일본인의 저서 '조선만화(朝鮮漫畵)' 가운데 '신문의 낭독'

 

1909. 8. 29.~1910. 8. 29.

1909년 출간된 일본인의 저서 '조선만화(朝鮮漫畵)' 가운데 '신문의 낭독'은 이런 말로 시작한다.

"조선에 신문종람소(新聞縱覽所)가 없다고 말하지 말라. 조선사람에게는 간단한 신문낭독 방법이 있다. 큰길을 향한 문밖에 대여섯 명이 모여 땅에 웅크리고 앉아 볕을 쬐는 가운데 근처의 박식한 사람이 어제의 신문지를 큰 소리로 읽는다. 운율(韻律)은 경(經)을 읽는 것처럼 가락을 붙이며 구두점을 찍고, 억양을 조절한다. 긴요한 시사 논책(論策)을 읽는 태도는 아니다. 몸을 뒤로 젖히고 가슴을 편 자세다. 담배를 피우고 가래침을 뱉으면서 덧 문짝에 기대어 태연자약하게 조금도 서두르지 않는 모습은 유학자의 풍모(儒者之風)가 있다."('朝鮮漫畵', 烏越靜岐·薄田斬雲 공저,1909)

신문·잡지·서적 등을 갖추어 놓고 누구든지 마음대로 열람할 수 있도록 한 장소가 '신문종람소'였다. 오늘의 도서관이나 소규모 신문열람실에 해당한다. 신문 구독률이 낮았던 당시에 계몽과 학문 진흥의 한 방편으로 종람소를 설치하여 많은 사람이 신문·잡지를 읽을 수 있도록 배려했다. 하지만 종람소는 그리 많지 않았다. 어느 지역·학교에 종람소를 설치했다거나, 설치할 것이라는 신문 기사가 실린 사실 자체가 이를 말해준다.

그래서 사람이 많이 모이는 저잣거리에서는 신문을 크게 소리내어 읽으면 사람들이 둘러서서 듣는 광경을 흔히 볼 수 있었다. '조선만화'는 그림을 곁들여서 한국의 여러 풍물을 가벼운 필치로 그린 책이다. 책은 이렇게 묘사한다.

"듣는 사람은 팔꿈치를 구부려서 턱을 괴고 손으로 볼을 떠받친다. 혹은 담뱃대를 물거나 혹은 왕래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때로는 고개를 끄덕이며 가끔 눈살을 찌푸린다. 하늘을 우러러보거나 머리를 숙이고, 결코 질문은 하지 않되 묵회(默會: 설명을 듣지 않아도 깨달음)하는 경우가 있는 것 같다. 읽는 사람, 듣는 사람이 함께 긍지를 갖고 있는 모양이다."

저자 우스다(薄田斬雲)는 통감부 기관지 '경성일보'의 문학 담당 기자로 '구한말의 신문사 풍경'이란 글을 쓰기도 했다. "신문 한 장은 그들의 사교기관이다. 처마 밑의 하수구를 덮는 널빤지 위에 앉았으니 종람료는 필요가 없다. 밀크커피를 강매당하는 일도 없다. 극히 평민주의며 간단하다. 그리고 무사태평하다."

우스다는 일본에서도 처음 신문이 발행되던 때에는 이런 상태였을 것이라고 썼다. 상점 화로 주변에 남자 5~6명이 모여들고 그 상점 고용인의 우두머리가 소학교 선생처럼 낭독하던 옛날이 생각난다는 것이다. '반드시 조선사람만을 웃을 일이 아니다'고 했다.

'조선만화'는 서구 문물을 먼저 받아들인 일본의 기자가 한국을 낮추어보는 우월적 시각이 드러난다. 하지만 그가 보지 못한 것이 있었다. 민족지의 기사와 논설이 '거리의 신문낭독' 같은 방식을 통해 조선사람들에게 항일정신을 고취하고 의병의 무장봉기를 널리 호소하는 '창의문(倡義文)'의 역할을 하였다는 사실이다. 신문에 실린 일본 침략 소식에 격분하여 총을 들고 싸운 의병이 많았다는 민심의 흐름은 놓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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