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100년전 우리는

[70] 덕수궁에 석조전을 세운 까닭

namsarang 2010. 3. 24. 17:18

  [제국의 황혼 '100년전 우리는']

 

[70] 덕수궁에 석조전을 세운 까닭

 

  • 권영민 서울대 교수·한국문학

 

1909. 8. 29.~1910. 8. 29.

 

'덕수궁 안에 양제(서양식)로 짓는 돌집이 근일에 필역(畢役)되었는데, 그 역비는 구십 삼만 이천 이백 구십 원이라.'

대한매일신보 1910년 4월 7일자 잡보란에 실린 덕수궁(德壽宮) 석조전(石造殿) 완공 소식이다. '신보'는 앞서 '덕수궁 안에 새로 건축하는 궁전이 황태자의 어용실로 계획된 것이지만 덕수궁 폐현실(황제폐하를 알현하는 장소)로 쓴다'(3월 30일자)는 소식을 전한 바 있다.

덕수궁 석조전의 건축 계획은 훨씬 이전부터 진행되었다. 1897년 4월 6일자 독립신문 기사에 의하면 영국인 브라운씨가 경운궁의 대지를 측량했다고 적혀 있다. 이때부터 설계와 준비과정을 거쳐 1900년 공사를 시작해 10년 만에 완공한 것이다. 석조전 동관의 기본 설계는 영국인 G. D. 하딩이 담당하였으며, 내부 설계는 영국인 로벨이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8세기 유럽의 궁전 건축 양식을 따른 3층 건물로, 정면 길이는 54.2m, 측면은 31m이다. 앞쪽과 동서 양측에 베란다를 설치했고, 건물 앞에 서양식 연못을 만들어 조경에도 힘썼다. 시공은 일본의 오쿠라 토목회사가 했는데, 이 회사는 경복궁 자선당을 해체해 일본으로 빼돌린 업체로 악명이 높다.

덕수궁 석조전.

석조전의 지하층은 시종들이 기거하는 방과 부속시설이었으며, 돌계단을 올라 들어가는 1층은 대접견실과 대기실, 2층은 황제와 황후의 침실로 사용되었다. 당시 국내에 세워진 서양식 석조 건축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건물이다.

석조전은 그곳 주인이었던 고종의 파란만장한 삶과 함께 숱한 사연이 얽혀 있다. 덕수궁은 17세기 초반 광해군 즉위 당시부터 경운궁(慶運宮)으로 불렸던 행궁(行宮·임금이 왕궁 밖으로 거동할 때 임시로 머무는 거처)으로, 오랜 동안 사용하지 않아 비어 있던 곳이다. 그런데 1895년 을미사변으로 일본인들의 손에 황후를 잃은 고종은 신변의 위협을 피하기 위해 그 이듬해에 경복궁을 떠나 러시아 공관으로 피신한다.

이 '아관파천(俄館播遷)' 이후 정국을 수습한 고종은 1897년 경운궁으로 옮겨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가 된다. 경운궁이 러시아를 비롯한 서구 열강의 공사 관저들로 둘러싸여 있었던 점을 생각한다면 고종이 경복궁을 버리고 이곳으로 옮기게 된 이유를 짐작할 만하다. 고종은 경운궁에 수많은 전각을 짓고 큰 서양식 석조 궁전을 건립토록 함으로써 제국의 위용을 다시 세우고자 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고종은 러일전쟁 이후 승승장구하는 일본의 힘을 막지 못한다. 1905년 치욕의 을사조약(乙巳條約)을 체결한 장소가 바로 이곳 경운궁이고, 일본 통감부의 압력에 굴복하여 순종에게 양위한 곳도 바로 이곳이다. 1907년 순종이 황제의 지위를 승계하면서 경복궁으로 이거하였고, 경운궁의 이름을 오늘날의 덕수궁으로 바꿔 놓는다. 고종은 양위 후에야 자신이 계획하였던 석조전의 완공을 보게 되는데, 1919년 운명의 순간까지 이곳을 떠나지 않는다. 해방 직후인 1946년 미소(美蘇)공동위원회가 열린 곳도 석조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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