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100년전 우리는

[71] 죽음을 넘어선 '협동학교'의 교육열

namsarang 2010. 3. 25. 20:15

[제국의 황혼 '100년전 우리는']
 
[71] 죽음을 넘어선 '협동학교'의 교육열
 
1909. 8. 29.~1910. 8. 29.
 
- 김기승 순천향대 교수·한국사 -

 

1910년 7월 18일 오후 3시 의병 10여명이 총과 칼로 무장하고 안동의 협동학교를 습격하여 교감 김기수(32세)와 교사 안상덕(24세) 등 3명을 살해했다. 학생들이 단발했다는 이유였다. 보성전문학교 교사였던 김기수와 보성중학 졸업생 안상덕은 신민회의 추천으로 협동학교 교사로 부임한 뒤 전교생의 단발을 단행하여 개화와 혁신의 기풍을 진작시키고자 하였다. 이에 안동의 보수 유림들이 격렬하게 반대하자 결국 두 교사는 피신할 수밖에 없었다. 10여일 뒤 사태가 진정된 듯하자 두 교사가 학교로 되돌아왔는데, 당일 오후 의병의 습격을 받아 희생되었던 것이다.(김희곤, '안동의 독립운동사')

협동학교는 1907년 이상룡, 유인식, 김후병, 김동삼(중간줄 왼쪽이 유인식, 뒷줄 왼쪽이 김동삼) 등 안동의 혁신 유림들이 경상도 북부 지역에 최초로 설립한 신식 학교였는데, 보수 유림들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다. 유인식은 부친 유필영으로부터 의절을 당했고, 스승 김도화로부터는 파문을 당했다. 퇴계학의 본고장인 완고한 안동에서 교육계몽 운동이 일어나자 신민회에서는 우수한 교사진을 파견하는 등 전략적으로 지원하였다. 이에 안동의 보수 유림들이 단발을 이유로 신민회 파견 교사들을 추방하였는데, 그런데도 교사들이 다시 돌아오자 무장 공격을 감행했다. 무장대는 인근 예천의 의병이었다. 안동과 서울의 계몽운동가들이 연합하자 안동과 예천의 보수 유림이 연합하여 대항했던 것이다.

▲ 안동의 협동학교<사진 왼쪽〉, 이상룡, 유인식, 김후병, 김동삼〈사진 오른쪽〉(중간줄 왼쪽이 유인식, 뒷줄 왼쪽이 김동삼) 등 안동의 혁신 유림들.

사안의 중대성 때문에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는 이 사건의 경과와 두 교사에 대한 추도회 개최 등을 상세히 보도하였다. 언론에서는 협동학교를 공격한 무장대를 '의병'이라 부르지 않고, '폭도', '어떤 도당', '살인자'라고 불렀다. 황성신문에서는 '조협동학교'(1910년 7월 23일)라는 논설을 통해 두 교사의 죽음에 조의를 표했다.

"안상덕, 김기수 양씨는 한성 교육계의 필수적 인물인데, 완고 수구의 풍기가 가장 강한 안동에 와서 주야로 학생들을 교육하여 한 줄기 광명을 싹트게 했는데, '악마가 졸지에 발작하여' 운명하게 되었으니 애도를 멈출 수 없다. 보수의 성질이 특수한 영남이 개화하여 교육이 진흥하고 민지가 개발되어 문화가 발전한다면 두 청년의 원혼에 위안이 될 것이다."

협동학교의 두 청년 교사가 피살된 후, 고인의 유지를 이으려는 청년들이 곧 나타났다. 평양의 숭실학교 졸업생 김하정과 서북협성학교 졸업생 김철훈이 협동학교 교사로 가겠다고 나섰다.

"나의 동지가 교육계에서 몸을 바치며 교육계에 피를 뿌리었으니 만일 협동학교가 이로써 폐지되면 나의 벗의 지업(志業)이 영멸(永滅)하는 것이오. 협동학교가 부활하면 즉 나의 벗이 영생함이니 우리들이 어찌 어렵고 위험하다고 두려워하여 나의 벗의 지업을 계속하지 아니하리오."(황성신문, 1910. 8. 2.)

서북의 청년들이 동지들의 유업을 계승함에 따라 협동학교는 폐교의 위기를 넘기고 다시 부활하게 되었으며, 이후 협동학교에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배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