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9. 8. 29.~1910. 8. 29.
백동전 교환이 막 시작된 1905년 7월 9일 독립관에 종로의 시전 상인 30명이 모였다. 10년 전 갑오개혁 당시 영업독점권이 사라질 때도 버텼던 시전 상인들이지만 화폐개혁이 시작되면서 심각한 금융공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새 화폐는 모두 일본인 수중에 들어가고 어음 거래조차 중단되자 종로 상인들 중에 도산하는 자가 속출하였다. 대책 마련을 위해 모인 상인들은 정부에 구제책을 요구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단체의 결성이 필요하다는 데 뜻을 모았다.
'일전에 독립관에서 일진회원과 각 상민 등이 합석하여 상무회의소를 조직하기로 의정하고 작일은 지전(紙廛·종이 상점) 도가(都家·동업자 회의소)에 다시 모여 회장 이하 임원을 선정하였다더라.'(황성신문 1905. 7. 12.)
7월 11일 지전 도가에 모인 상인들은 단체규칙을 제정하고 농상공부로부터 인가를 얻어 마침내 19일 경성상업회의소를 창립한다. 초대 의장에 김기영, 부의장에 곽성삼이 선출되었으며 사무소는 임시로 장통방 광교에 위치한 천일은행에 두었다. 상업회의소 창립을 두고 황성신문은 '이 장한 일에 십분 만족의 동감을 표하며 조속히 그 발달의 좋은 결과가 있기를 크게 축원하는 바'(1905. 8. 7.)라 하였다.
- ▲ 경성상업회의소 초대 의장 김기영(사진 왼쪽), 1915년 조선상업회의소령에 따라 일본인 상업회의소에 강제 통합(통합된 뒤의 회의소 건물)되었다.(사진 오른쪽)
급무는 도산의 참혹한 지경에 빠진 상인에 대한 구제방침을 정부에 요청하는 일이었다. 영업을 전폐하고 상업회의소에 모인 상인들의 항의에 탁지대신 민영철은 300만원의 대출을 약속하지만 재정고문 메가타의 반대로 무산된다. 상인들은 격앙하였고 고종은 내탕금 30만원을 대하하지만 메가타는 이마저도 사용을 방해하였다. 상업회의소는 화폐개혁의 부당성을 지적한 청원서를 조정과 통감부에 내고 이군필 등 3인을 동경에 보내 일본 총리와 유력자에게 진정하였다. 이런 민심을 무마하기 위해 일본은 우리 정부에 150만원의 무이자 대부를 한다.
150만원은 대부분 식민지 금융기관의 설립과 운영에 투입되었으며 이 일에 종로 상인들이 대거 참여하였다. 조진태 조병택 배동혁 백완혁 한상룡 같은 종로 백목전·미전 상인 40여명은 한성창고회사와 한성어음조합에 출자하였다. 이들이 선택한 길은 식민지 금융기관 설립에 동조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일본의 지배를 달가워한 것은 아니었다. 1906년 황실 하사금 2000원과 상인들의 모금으로 백목전 도가를 구입하여 신축한 상업회의소 건물에 매일신보사에서 이전해온 국채보상처리회 사무소가 있었고, 일진회를 성토하는 국민대연설회 사무소도 있었다. 일진회가 합방청원 성명서를 발표하자 상업회의소는 '대의원 중 일진회원인 자를 모두 제명하기로 결의'(황성신문 1909. 12. 7.) 하였다.
합방 이후 경성상업회의소는 1915년 조선상업회의소령에 따라 일본인 상업회의소에 강제 통합(통합된 뒤의 회의소 건물)돼 10년의 단명에 그쳤다. 하지만 전국 각지에 일본인 상공업자 단체에 대항하여 상업회의소·민의소 등의 이름을 단 17개의 조선인 단체가 설립되는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