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9. 8. 29.~1910. 8. 29.
1909년 12월 4일, 친일단체 일진회(一進會)는 합방성명서를 발표하고, 황제와 총리대신, 통감에게 합방청원서를 전달했다. 일본 정계에서 강제합병이 결정된 것은 그해 4월이었지만, '합방' 문제가 공식적으로 제기된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아(我) 황제의 만세 존숭(尊崇)하는 기초를 확고히 하며, 아(我) 인민의 일등(一等) 대우하는 복리를 향유하여 정치와 사회를 익익(益益) 발전하기로 주창하여 일대 정치기관을 성립할지면 우리 대한의 보호 열등에 재(在)한 수치(羞恥)를 해탈(解脫)하고 동등 정치에 재(在)한 권리를 획득하는 법률상 정합방(政合邦)이라….'('일진회 합방성명서', 1909.12.4.)
- ▲ 1908년 12월 이용구 집에서 기념촬영한 일진회 원호대 일동
일진회는 1904년 12월 송병준이 이끄는 독립협회 계열의 유신회와 이용구가 이끄는 동학 계열의 진보회가 일본의 힘을 빌려 양반 중심의 내각을 타도하기 위해 결성한 정치단체였다. 회원 수가 12만여명에 달하는 최대의 정치단체(1908년 12월 이용구 집에서 기념촬영한 일진회 원호대 일동 / 출처 : 한일병합사, 눈빛)였다. 일본 군부의 비호를 받던 일진회는 통감부의 지원을 받던 이완용 내각과 치열한 권력 투쟁을 전개했다. 민중의 권익을 대변하는 '민당(民黨)'을 표방한 일진회는 '양반 내각' '문벌 내각'을 상대로 한 권력 투쟁에서 정권을 장악하는 데 실패하자, 일본에 외교권을 영구히 양도하더라도 내각과 의회를 자신들이 차지하려는 계략에서 '합방'을 청원한 것이었다.
"기자 가로되 오호라! 마귀 무리의 공교한 행동은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느뇨. 한국을 가져다가 일본에 합하면 인민은 북해도에 아이누 종족이 될지어늘, 이제 말하기를 인민은 일본 인민과 동등이 된다 하니 오호라! 괴이하다. 너희가 누구를 속이느뇨. 하늘을 속이는 도다."('대한매일신보' 1909.12.5.)
일진회의 합방성명서는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했다. 이완용 내각에 대항하기 위해 일진회와 연합을 모색하던 대한협회와 서북학회는 3파 연합의 결렬을 선언했고, 통감부는 아직은 시기상조라는 이유에서 합방청원서를 반려했다. 이완용 내각도 일진회 방식의 합방에는 반대했다. 그 대신 합방의 전제 조건으로 메이지유신 이후 화족(華族)의 대우 방안을 마련했듯, 양반의 지위를 보장하는 방안을 마련해 줄 것을 일본 정부에 요구했다. 일진회의 합방성명서는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했지만, 그것으로 합방은 기정사실이 되고 합방 이후 한국의 정치 체제에 관한 논쟁을 촉발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