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100년전 우리는

[61] 일제의 언론탄압과 '벽돌신문'

namsarang 2010. 3. 15. 18:43

[제국의 황혼 '100년전 우리는']

 

[61] 일제의 언론탄압과 '벽돌신문'    

정진석 한국외국어대명예교수·언론정보학

  • 1909. 8. 29.~1910. 8. 29.

  •  

  •  
    사장 이종일(李鍾一)

    한말에 '벽돌신문'으로 불렀던 지면이 있었다. 활자를 뒤집어 엎어 검은 벽돌 쌓은 모양의 지면을 일컫는다.조판을 끝내고 인쇄 직전 검열에 걸린 기사를 삭제한 탓이다. 한자로는 '복판(覆板)신문'이었다. 러일전쟁 후 일본 헌병대는 한국신문에 사전검열을 실시하여 마음에 들지 않는 기사를 깎아내도록 명령했다.

    첫 벽돌신문은 '한일의정서' 조인을 보도하려다 기사가 삭제된 1904년 2월 24일자 황성신문이다. 제1차 한일협약(1904.8.22.) 이후 침략의 발걸음이 빨라지면서 검열 강도는 더욱 세졌다. 우리말에 능통한 일본인 통역관들은 이 잡듯이 기사를 검열했다.

    1904년 10월 9일 제국신문에 강제정간 명령이 떨어졌던 상황은 이렇다. 일본 헌병사령부 장교와 헌병 등이 신문사에 들이닥쳐 발행정지를 명했다. 인쇄 중이던 신문을 압수하고 인쇄기에 딱지를 붙여 봉했다. 신문사로서는 독자에게 '발행 중단'을 알리는 '사고'조차 낼 수 없었다. 정간은 한 달 뒤에 해제되었다(제국신문, 1904.11.9.).

    '벽돌신문'
    이 신문이 1906년 3월 17일부터 3일간 당한 정간은 검열에 저항한 항일 정신의 발로였다. 단평 '시사촌언(時事寸言)'을 삭제하라는 명령을 받고도 전체 기사의 활자를 모조리 뒤집어엎지 않은 채 절반 정도는 그대로 살려두어서 독자들이 퀴즈 풀 듯이 대강 짐작할 수 있도록 했다가 정간을 당했다. 사장 이종일(李鍾一)은 불려가 "앞으로 조심하겠다"는 다짐을 해야 했다. 벽돌신문은 날이 갈수록 자주 나타났다.

    영국인 배설이 발행한 대한매일신보(이하 '신보')는 유일하게 탄압을 피할 수 있었으나 1907년 이후에는 이 신문도 검열의 손길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신보의 논설 '벽돌신문을 읽는 법'은 검열의 실상을 폭로하고 국민의 경각심을 일깨웠다. "기사에 무슨 말을 게재하였기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한 자도 남기지 않고 이렇게 엎어놓았는가. 신문을 보는 뜻은 시국 형편과 외국 소문을 듣기 위함인데 기사가 안개 속에 꽃을 보고 물 속에 달을 잡으려 하는 것 같아서 주야를 불문하고 몇 백번을 읽어도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으니 앞으로 신문 구독을 중단하겠다." 독자가 토로한 불만이었다.

    신보는 이렇게 풍자한다. "자네가 지금도 신문 보는 법을 알지 못하는가. 런던의 각 신문은 비록 뜻이 깊다하나 영문만 알면 가히 볼 수 있으나 오직 우리 신문은 이 나라에 항상 쓰는 국한문만 잘 한다고 능히 읽지 못하는 것이니 이는 일인의 검열에 구속이 되어 먹투성이가 된 것이다." 고로 한국의 신문은 "벽돌신문의 기사에 있는 말이 이 나라에 유익한 말인가 해로운 말인가를 연구하면서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오호라, 오늘날 국민 된 자가 강구할 것은 오직 피를 뿜고 눈물을 흘리며 자유권을 사들일지니 만일 이렇게 하지 아니하면 비록 동서양 시세와 고금 사적과 각종 학술 기예를 무불통지할지라도 필경 다른 사람의 노예가 되고 말 것이다.

  • "(신보 한글판, 1908.4.26, 국한문판은 4월 23일자 '覆板新聞紙(복판신문지)의 讀法(독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