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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의 기업인 서상돈
일본에서 빌린 국채는 1300만원이었다. 1905년 6월부터 일본인 재정고문 메가다(目賀田種太郞)는 높은 금리의 악성 차관을 들여오도록 했다. 도로 학교 병원 등 사회기반시설 공사가 명분이었으나 경제를 파탄상태로 몰아넣어 일본 경제에 예속시키려는 책략이 숨어 있었다. 1906년도 대한제국 예산은 세입총액 1318만9336원에 세출총액 1395만523원이었으므로 국채 1300만원은 국가예산과 맞먹는 금액이었다. 담보는 한국의 관세수입이었다. 차관의 사용도 통감부가 임의로 하는 것이어서 한국정부는 돈을 만져볼 수도 없었다. 통감부는 차관을 계속 들여와 1910년 총액이 4400만원을 넘어섰다.("총독부통계연보" 1910, '구한국국채 현재액')
- ▲ 대구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에
- 세워진 기념비.
국채보상운동은 이 같은 위기를 타개하려는 절박한 상황에서 일어났다. 대구의 기업인 서상돈은 1907년 2월 현지 애국인사들에게 "국채 1300만원을 갚지 못하면 장차 토지라도 주어야 하므로 2천만 동포가 담배를 석 달만 끊고 그 대금으로 국채를 보상하자"고 제안하여, 참석자 전원의 찬성으로 '국채보상취지서'를 발표했다. 이어 국민대회를 열고 모금활동을 시작했다. 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 등이 이 사실을 보도하고 캠페인을 벌여 적극 지원하였다. 고종도 동참하는 뜻으로 담배를 끊었고(대한매일신보, 1907.2.27.), 지도급 인사들의 금연 소식이 연일 신문에 실렸다. 학생 군인 등 이름 없는 백성들이 성금을 내놓았고, 부녀자들은 소중히 간직했던 비녀와 가락지를 뽑았다(대구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에 세워진 기념비). 신문사에는 전국 방방곡곡에서 연일 성금이 답지했다.
일본이 이 운동을 묵과할 리 없었다. 통감부는 운동의 실질적 중심기관이었고 '국채보상의연금총합소'가 되었던 대한매일신보를 탄압하기 위해 영국인 사주(社主) 배설(裴說: Ernest Thomas Bethell)의 처벌과 추방을 획책하는 한편, 신문 제작 책임자 양기탁(梁起鐸)을 의연금 횡령 혐의로 체포하여 재판에 회부했다. 이로 인해 운동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1909년 11월 '국채보상금처리회'가 결성됐다. 전국에서 모인 돈으로 '학교를 설립하자' '식산(殖産)을 진흥하자' 등의 의견이 백출하였으나 실행에 옮기지 못하는 사이 강제합병이 이루어졌다. 1910년 12월 12일 총독부는 '국채보상금처리회'가 관리 중이던 9만여원과 '국채보상금총합소'의 4만2000원을 모두 압수했다. '국민의 핏방울(血点)'이요, 애국심이 결집된 '고혈(膏血)'(황성신문, 1907.11.19)이었던 성금은 허무하게도 일제의 손에 넘어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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