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100년전 우리는

[79] 천일염, 음식 맛을 바꾸다

namsarang 2010. 4. 3. 16:22

 [제국의 황혼 '100년전 우리는']

 

[79] 천일염, 음식 맛을 바꾸다

  • 전봉관 KAIST교수·한국문학

 

1909. 8. 29.~1910. 8. 29.

'탁지부 재정고문부에서 경영하는 인천군 주안면 천일제(天日製) 시험염전이 준공되어 목하 제염(製鹽) 중인데 재정감사장(財政監査長) 목하전(目賀田)씨가 총리대신 이완용, 내부대신 임선준, 탁지부대신 고영희, 농상공부대신 송병준 등을 청요(請邀)하여 익일에 해지(該地)를 시찰하기 위하여 남대문역에서 특별차를 탑승하고 출발한다더라.'('황성신문', 1907. 9. 22.)

1907년 인천 주안에 설치된 1정보 크기의 시험염전은 한국 최초의 천일염전이었다. 시험 결과 주안의 천일염이 양호한 것으로 나타나자, 탁지부에 파견된 일본인 관리들은 주안과 평안남도 광양만 일대에 대규모 관영 천일염전을 설치했다. 1909년부터 1914년까지 13개소 1100여 정보의 천일염전이 축조되었고, 광복 직전에는 면적이 2800여 정보까지 늘어났다(1정보=약 9917㎡).

1907년 인천 주안에 설치된 1정보 크기의 시험염전.
한국의 전통 소금은 염전에서 바닷물의 염도를 높인 후 그것을 끓여서 얻은 자염(煮鹽)이었다. 자염은 천일염에 비해 짠맛이 덜한 대신 구수한 맛이 있고 입자가 고우며, 칼슘을 비롯한 무기질이 풍부한 것이 특징이었다. 그러나 손이 많이 가고 연료비가 많이 들어 생산원가가 높았다. 솔잎과 목재를 연료로 이용한 한국산 자염은 연료비가 전혀 들지 않는 청염(淸鹽·중국산 천일염)은 물론 석탄을 연료로 이용한 일본산 자염보다 생산원가가 높았다. 소금 100근의 가격은 청염이 1000원, 일본염이 1300원, 한국산 자염이 1800원 정도였다. 청염은 품질이 떨어지고 한국인 입맛에 맞지 않았지만, 가격 경쟁력을 바탕으로 한국의 소금 시장을 맹렬히 잠식해 들어왔다.

개항 이후 소금의 수요는 해마다 격증했다. 인구 증가로 간장 된장 김치 등 소금에 절인 음식의 소비가 늘어난 데다 어획량의 증대로 어물을 가공하거나 저장하는 데도 소금이 많이 필요했다. 1908년경 한국의 소금 소비량은 3억5000만근가량이었는데, 국내산 소금의 생산량은 2억5000만근에 불과했고, 부족한 1억근은 일본 청 대만 등지에서 수입했다(1근=0.6㎏).

          한국의 전통 소금은 염전에서 바닷물의 염도를 높인 후 그것을 끓여서 얻은 자염(煮鹽)이다.

일본은 소금 수입을 줄이고 재정 수입을 늘리기 위해 관영 천일염전의 설치를 결정했다. 자염으로는 값싼 청염과 경쟁할 수 없기 때문에 천일염의 도입이 불가피하며, 천일염의 대량 생산으로 조선의 식용 소금뿐만 아니라 공업용 소금까지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을 것이라 보았다.

'탁지부에서는 3년 계획으로 염전 300만평을 광양만에 설비하는 중인데 그 중 먼저 필역된 염전 280평에서 지난 8일 소금 1천근을 제조한지라 3년 후에는 매년 소금 1억850만근씩이나 산출되리라더라.'('신보', 1910. 5. 13.)

한국산 천일염은 생산 초기 짠맛이 강하고 입자가 굵고 빛깔이 검어 식용으로 외면당했다. 또 일본 관리가 생산을 주도한다 해서 '왜염(倭鹽)'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러나 천일염을 자염과 비슷하게 가공하는 기술이 개발되자, 한국인의 주방에서 자염은 천일염으로 점차 대체되었다. 그에 따라 음식 맛도 바뀌었다. 자염은 1960년경 거의 자취를 감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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