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100년전 우리는

[80] 이설과 최익현, 황제를 꾸짖다

namsarang 2010. 4. 4. 16:35

[제국의 황혼 100년전 우리는']

 

[80] 이설과 최익현, 황제를 꾸짖다

  • 김기승 순천향대 교수·한국사

 

1909. 8. 29.~1910. 8. 29.
 
"새가 장차 죽을 때는 그 울음이 슬프고, 사람이 장차 죽을 때는 그 말이 착하다."

홍주 의병 이설(李楔·1850~1906)이 1906년 4월 고종 황제에게 올린 상소문에서 한 말이다. 몇 개월 전 을사오적(乙巳五賊) 처단을 요구하였던 이설은 질병과 고문 후유증으로 죽음을 감지하고 유소를 올렸다.

"즉위하신 지 40여년 동안에 칭송할 만한 일이 하나도 없고 기록할 만한 정치도 없습니다. 그럭저럭 게으르고 퇴폐하여 시들시들 어둡게 막혀 조종(祖宗)이 이룩한 법이 깨끗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이제 마침내 망국의 군주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면서 위나라의 무공과 한나라의 무제가 90세와 70세에 후회하여 현군이 된 것을 본받고 깊이 새겨 경계할 것을 호소했다. 앞서 1905년 을사조약 직후에 올린 '청토매국제적소(請討賣國諸賊疏)'에서 이설은 나라가 멸망하면 군주는 자결해야 한다는 극단적 주장까지 펼쳤다. "고금 천하에 망하지 않는 나라가 없으며 죽지 않는 사람이 없다. 고종 황제는 명의 마지막 황제인 의종(毅宗)이 나라가 망했을 때 자결했던 사례를 본받아야 한다." 또 그러한 사태를 막기 위해서는 우선 매국노를 처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최익현(崔益鉉·1833~1906)<채용신이 그린 면암의 초상화>.

이설은 전국의 선비와 백성 100만명을 서울로 소집할 것을 제안했다. 그들로 하여금 비무장으로 궁궐을 지키면서 말과 글로써 일본인과 싸우도록 하자는 것이다. 일종의 비폭력 대중 시위운동의 방법을 제안했던 것이다. 이러한 건의가 수용되지 않자 '망국의 군주' 운운하면서 고종의 반성을 촉구했던 것이다.

최익현(崔益鉉·1833~1906)은 을사오적을 처단하라는 자신의 상소에 고종이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자 "실성할 지경으로 비통하다"고 하면서 재차 상소문을 올렸다. 그는 고종에게 '역적의 죄가 없다고 생각하는지 아니면 그들의 배후에 있는 세력을 두려워하는지' 물으면서 다음과 같이 질타했다.

"폐하께서 두려워하실 것이 과연 무엇입니까? 폐하에게 지금 국가가 있습니까? 토지가 있습니까? 인민이 있습니까? 이같이 국가도 없고 토지도 없고 인민도 없다면 폐하께서 두려워해야 할 것은 망국의 황제가 될까하는 두려움뿐입니다."(최익현, 請討五賊疏)

의병장 최익현은 고종이 충신에 대한 포상과 반역자에 대한 처벌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40년간 재임하면서 집도 없는 처지가 되었다'고 하였다. 지금이 바로 나라가 망하는 순간으로 잃을 것이 없는데 무엇을 두려워하느냐고 질책한 것이다.

황제의 잘못을 지적하는 상소는 죽음을 각오한 충간(忠諫)이었다. 을사조약 체결 이후 민영환, 조병세, 홍만식 등은 자결함으로써 애국심을 표현하였고, 수많은 선비와 인민들은 상소, 의병, 결사 등 다양한 방법으로 구국의 뜻을 펼쳤다. 국권피탈에 통분한 이설은 식음을 전폐하여 죽음을 맞았고, 최익현은 일본군에 체포되어 쓰시마섬에 유배 중 단식하다 병사했다. 이러한 희생 위에서 고종은 1907년 헤이그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하고, 전국의 유력한 유학자들에게 밀지를 보내어 의병 궐기를 촉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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