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100년전 우리는

[78] 하루에 천리길을 가는 철도와 전보

namsarang 2010. 4. 2. 21:24

 [제국의 황혼 '100년전 우리는']

 

[78] 하루에 천리길을 가는 철도와 전보

이헌창 고려대 교수·경제학

 

1909. 8. 29.~1910. 8. 29.

울산에 사는 심원권은 1910년 5월 30일 일기에서 울산장에 상인이 없는 까닭을 "사농공상(士農工商)이 철도로 다니므로 천리길을 하루 이틀에 왕래할 수 있어서 무릇 일이 쉬워졌기 때문이다"라고 보았다. 그리고 "전보는 일시에 천리의 소식을 전한다"고 감탄한다. 조선의 국운이 다할 무렵 교통의 변혁은 농촌 5일장에까지 충격을 가했고, 근대문명의 이기에 대한 이해는 농촌으로 파급되었다.

유길준은 '서유견문(西遊見聞)'에서 근대문명의 이기로서 전신기를 독자의 항목으로 자세히 소개하면서 각 신문사는 각처에 기자를 파견하여 긴급한 사정을 전보로 통한다고 했다. 그는 증기기관차와 철도도 별도의 항목으로 소개하면서 "각지 물산을 교역하여 물가를 평준하고 도농 간의 왕래를 간편히 하여 인정을 상통하기 때문에 세간의 교통과 상업이 일신하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평가한다.

개항기에 조선은 전선을 가설하고 철도 부설을 시도하였으나 자금난으로 결실을 맺지 못했다. 1884년 일본 정부에 의해 부산과 일본을 연결하는 해저전선이, 1885년에는 중국 차관에 의해 인천~서울~의주 간의 서로(西路)전신선이 가설된다. 조선정부는 1887년 조선전보총국을 창설하고, 서울~부산 간의 남로전신선을 가설한다. 이후 전신선은 조선 정부의 필요에 따라 가설, 확장되었다.

일본은 1900년 경인선〈사진〉(서대문역 모습).

청일전쟁 이후 열강의 한국 철도 이권을 획득하기 위한 경쟁이 치열해진다. 1898년 일본이 경부철도부설권을, 미국이 서울 내외의 전기철도부설권을 획득한다. 한미전기회사는 1898년 서대문에서 청량리에 이르는 전기철도를 부설한다. 일본은 1900년 경인선을, 1905년 경부선을, 1906년 경의선을 완공한다.

일제에 의해 부설된 철도와 전신은 식민지화 기초사업이었다. 철도는 군사적 지배에 기여하였을 뿐 아니라 경제적으로는 대량의 일본 상품을 내륙까지 신속하게 침투시키고, 조선 내륙의 식량과 원료를 효과적으로 반출시켰다. 일본 상인과 일본 자본의 내륙 진출을 촉진하는 강력한 수단이었던 것이다. 철도와 전신선의 부설 과정에서 토지의 강제 수용과 가옥·분묘의 파괴가 자행되었다. 그래서 철도와 전신선을 파괴하다가 처형된 사람이 적지 않았다.

철도와 전신선은 시장과 공업의 성장을 지원하는 물질적 토대이기도 했다. 조선인은 철도를 통해 근대문명에 대한 자각을 높이고 자신의 경제적 향상을 위해 그것을 활용할 수 있었다. 철도망은 전통적 육로 교통의 애로를 극복하여 시장 통합에 기여하였다. 1911~38년간 경부·경의선의 여객은 243만명에서 4505만명으로 19배 늘었고, 화물은 107만t에서 1392만t으로 13배 늘었다. 철도와 마찬가지로 식민지 지배를 위해 설치된 통신망은 점차 조선인의 상공업 활동에도 활용되었다. 1906~39년간 100명당 전보 발신 수는 7.9건에서 61.5건으로 증가하고, 조선인이 발신한 전신의 비중은 10.9%에서 29%로 높아졌다. 그리하여 이 시기 구축된 사회간접자본은 해방 후에도 활용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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