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9. 8. 29.~1910. 8. 29.
영국 '데일리 메일'의 맥켄지(F.A.Mc Kenzie) 기자는 1907년에 충주 근처 산속까지 들어가서 의병을 취재했다. 위험을 무릅쓰고 의병을 직접 찾아간 유일한 서양 언론인이었다. 의병 가운데 훈련된 군인은 극소수였으며 조직체계도 허술했다. 양반 복장의 긴 도포를 입은 의병도 있었다. 얼굴은 그을렸고 몸은 깡말랐다. 낡은 무기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했지만 일본이 장악한 통신시설을 비롯하여 일본군과 경찰을 산발적으로 습격하여 타격을 주었다."그들은 매우 측은하게 보였다. 전혀 희망이 없는 전쟁에서 이미 죽음이 확실해진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몇몇 군인의 영롱한 눈초리와 얼굴에 감도는 자신만만한 미소를 보았을 때 나는 확실히 깨달은 바가 있었다. 가엾게만 생각했던 나의 생각은 아마 잘못된 생각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들이 보여주는 표현방법이 잘못된 것이었다 하더라도 적어도 그들은 자기의 동포들에게 애국심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있었다."(맥켄지, '한국의 독립운동', 1920)
군대해산 직후인 1907년 8월부터 1911년 6월까지 4년 사이 의병과 일본군의 충돌은 2852회에 달했다. 교전 의병은 14만1815명이었고, 그 중 사망 1만7779명, 부상 3706명이었다. 일본측도 사망자 136명에 부상자가 277명이었다(김정명 '조선독립운동'Ⅰ 등).
- ▲ 1904년 6월 25일자 영국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 뉴스'에 실린 의병을 사살하는 일본군대 모사화.
의병은 보는 입장에 따라 여러 이름으로 번역되었다. 맥켄지의 책은 '정의의 군대' 즉 '의병(Righteous Army)'이었다. 대한매일신보 사장 배설의 변호를 맡았던 영국인 크로스(Crosse)는 한국어 발음대로 '의병(Euipyong Society[Organization]) 또는 '의용군(Volunteer Movement)'으로 불렀고, 피고 신분이었던 배설은 법정에서 당당히 '의병'이라고 말했다. 주한 영국총영사 헨리 코번은 '애국군(Patriotic Soldiers)'으로 번역했다(Corea, Annual Report, 1907). 반면 일본측 문서와 친일 신문은 '폭도'로 불렀고, 영어로는 반역자, 반도(叛徒), 폭동(insurgents, rebels, riot)으로 번역했다.
의병에 대한 민족진영 신문의 논조도 시간이 흐르면서 두 갈래로 나뉘었다. 대한매일신보는 1910년까지 의병의 무장투쟁을 격려하는 논조를 잃지 않으면서 일본군의 무자비한 보복과 민간인 살상을 폭로했다. 하지만 황성신문은 이 무렵 비판적인 태도로 바뀐다. '의병이라 칭하는 도당'이라 표현하는가 하면, '경고 의병제군'(1907.9.25) 등 의병의 폐해와 무모함을 지적하는 논설을 세 차례나 싣는다. '훈련받지 않은 졸(卒)과 오합의 무리로 단지 혈기만으로 전략을 구비한 군대와 교전코자 함은 어리석다'는 논리였다. 순수한 우국충정에서 시작된 의병항쟁이었지만, 불량배가 뒤섞여 민간에 피해를 주는 경우도 있었다. 일본군의 공세로 약화된 의병은 강제합병 후 만주와 연해주로 근거지를 옮겨 투쟁을 이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