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100년전 우리는

[83] 도시의 풍경을 바꾼 전차

namsarang 2010. 4. 7. 22:36

 [제국의 황혼 '100년전 우리는']

 

[83] 도시의 풍경을 바꾼 전차

  • 박기주 성신여대 교수·경제학

1909. 8. 29.~1910. 8. 29.

근대적 도시화의 중심인 전철이 조선에 처음 부설된 것은 미국에서 전차가 처음 운행된 지 불과 10년 만이었다. 미국의 전차에 큰 관심을 갖고 있던 고종에게 미국 공사 알렌이 추천한 인물은 영국 태생의 미국인 콜브란이다. 광산·철도 사업가인 그와 동업자 보스트윅은 한국 최초의 철도인 경인철도 공사를 청부받아 공사를 하던 중 새로운 사업거리를 찾다가 전차부설에 눈을 돌렸다.

고종은 콜브란과의 협상을 통해 황실의 공동출자로 한성전기회사를 설립한다. 사장은 한성부 판윤 이채연이지만 부설공사 일체를 도급받은 콜브란이 회사를 위탁경영하였다. 콜브란은 교토 전철을 설계한 미기헤이 이치로(眞木平一郞)를 초빙, 1898년 말 서대문~종로~청량리(홍릉) 노선(본선)을 준공한다. 궤도 부설을 위해 종로 거리에 즐비하던 가가(假家·임시가옥)는 모두 철거되었다.

본선 외에 1899년 용산~남대문~종로 노선, 1900년 남대문~서대문 노선이 개통된다. 이 세 노선은 경운궁(현재의 덕수궁)을 둘러싸는 교통망을 형성해 이현, 종로, 칠패의 전통시장을 하나로 잇고 기선과 철도로 화물이 집산되는 용산을 도심과 연결했다. 1907년에는 전차 이동의 편의를 위해 동대문과 남대문 옆 성벽을 허물고 문 안을 통과하던 전차궤도를 문 밖으로 옮겼다.

1900년대 남대문을 지나가는 전차 모습.

전차는 아무 데서나 손만 들면 탈 수 있었다. 화차에 지붕을 얹은 정도여서 비가 올 때는 우산이 필요했고 겨울철에는 북한산의 찬바람을 막을 길이 없었다. 그러나 빠르고 편한 전차는 인기가 좋아 초기에 하루 평균 2000명 정도이던 승차인원이 1908년에는 1만6000여명으로 급증하였다.

도심을 가로지르는 전차는 큰 구경거리이자 달리는 광고판이었지만 종종 사고를 유발했다. 영업 7일째 어린아이를 치어 사망케 한 사고가 생기자 성난 군중이 운전수를 끌어내 폭행하고 전차 한 대를 전소시켰다. 이 일로 두 달 반이나 전차운행이 중지되었지만 이후에도 사고는 잇달았다. 아이들이 놀이삼아 전차 앞뒤에 매달리는 통에 사고가 나기도 하고 취객이 선로를 건너다가 전차에 받혀 부상하는 일도 종종 일어났다.

공사대금 상환 등 회사부채 문제를 두고 콜브란과 황실 측이 갈등을 보이다가 결국 러일전쟁이 발발한 해에 미국법인의 한미전기회사에 소유권 일부와 경영권이 넘어갔다. 경영권을 장악한 콜브란은 1909년 회사를 일한와사전기회사에 170만원에 매각하였다. 회사가 일본인 손에 넘어가자 "서울 시민들이 분노해 일어나 콜브란을 쫓아냈다"고 황현은 '매천야록'에 기록했다.

일한와사전기회사는 각 노선을 복선화하고 전차를 증설키로 한다(황성신문 1910.1.11.). 또한 일본인이 밀집한 을지로 입구에서 왕십리까지의 노선(황금정선)이 부설되고, 충무로 4가~혜화동, 남대문~적선동~안국동을 돌아 종로에 이르는 남북 연결노선이 부설되어 남촌(남산 아랫자락과 명동 일대)의 일본인 거주지와 북촌의 위락.위생시설이 연결되었다. 전차 덕분에 서울은 점차 남촌을 중심으로 성장하면서 공간적으로 확장되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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