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직 현장

무 하나 뽑아 먹고 싶어요

namsarang 2010. 4. 14. 21:08

[사도직현장에서]

 

무 하나 뽑아 먹고 싶어요

                                                                                                                                                   노유자 수녀(성 바오로 가정호스피스센터장)

    가정호스피스는 더 이상 치료 효과를 기대하기 어려운 말기 환자와 그 가족을 위해 주로 가정방문을 통해 환자의 신체적, 심리적, 영적 고통을 덜어 주려고 팀으로 활동한다.

 우리 센터는 방문간호 외에도 여러 프로그램을 통해 다양한 방법으로 환자들 고통을 덜어주고 사랑을 나누려고 노력한다. 그 중 주간 호스피스를 통해 환자분들을 센터에서 뵐 때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짧은 순간순간이 얼마나 소중한 선물인지 새삼 깨닫게 된다.

 병원 치료조차 할 수 없어 좁은 집안에서 내내 격심한 고통과 싸워야 하는 환자와 그 가족은 심신이 피폐화되기 쉽다. 그런 분들께 작은 위로라도 되고자 마련한 것이 주간 호스피스 프로그램이다. 한나절에 불과한 짧은 시간이지만 센터로 환자분을 초대해 정성스럽게 마련한 식사도 대접하고, 춤도 추고, 노래도 부르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집에서는 물 한 모금 제대로 넘기지 못하던 환자도 센터에서는 활기찬 모습을 보이니 환경 변화가 몸과 마음에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어 주는 것임에 틀림없다.

 일전 주간 호스피스에 참석한 한 환자가 유독 생각난다. 그 위암 말기 남자환자는 호스피스 팀과 수녀원 마당을 산책하다 마치 금은보화나 발견한 듯한 큰 소리로 외쳤다.

 "아! 무다! 나 저 무 하나 뽑아먹고 싶다."

 수녀원에는 수녀들이 가꾸는 텃밭이 있는데 부드러운 흙을 뚫고 뽀얗게 밑동을 드러낸 무가 환자의 눈을 끈 것이다. 먹을거리가 풍족하지 않던 어린 시절, 밭에서 뽑은 무를 이로 대강 훑어내려 밭두렁에 앉아 '아작 아작' 먹던 기억이 되살아난 것이다. 환자의 휠체어를 네 명이 들어 밭 한 가운데로 모셨다. 무청 한 잎 꺾일까 싶어 조심스레 밭을 가꾸시던 수녀들에게 미안한 마음도 들었지만 이 밭이 모두 망가진들 어떠랴 싶었다. 환자의 간절한 소망을 이뤄주기 위해 밭이 망가진 걸 알면 수녀들도 잘했다 하리라.

 그 환자는 휠체어에 앉아 밭에서 무 세 개를 뽑아서는 냄새를 맡고 이리보고 저리보고 무릎에 싸안으며 무척이나 행복해 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가져간 무를 드시고는 옛 맛이 아니라며 씁쓸해하셔서 지켜보는 가족들을 기쁘게도, 슬프게도 했다고 한다.

 임종을 앞 둔 환자들 소원은 의외로 단순해 우리를 숙연하게 한다. 추어탕 한 그릇, 명절에 먹던 동태전, 휴게소 호두과자 등.

 별 의미 없이 흘러간 작은 일상에는 사랑했던 이들과 나눈 소중한 추억과 행복했던 마음이 올올이 숨어 있나보다. 그리고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짙은 향기로, 애달픈 노래로, 뜨거운 눈물로 우리를 불러 세운다. 사랑하며 살라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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