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정부의 문화재
1.망월사 혜거국사부도
종 목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22호
지 정 일 1985.06.28
소 재 지 경기 의정부시 호원동 산91
시 대 조선시대
부도는 승려의 무덤을 상징하여 그 유골이나 사리를 모셔두는 곳이다. 망월사 내에 있는 이 부도는 혜거국사의 사리를 모시고 있다. 기단 위에 탑신을 올리고, 꼭대기에 머리장식을 갖춘 모습으로, 탑신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8각을 이루고 있다.
3단의 바닥돌 위에 마련된 기단은 그 윗면에 홈을 파서 탑신의 몸돌을 받도록 하여 안정감을 준다. 탑신의 둥근 몸돌은 아랫부분에 연꽃무늬를 두었다. 지붕돌은 밑면에 3단의 받침을 두었고, 처마는 각 귀퉁이마다 꽃장식을 달았다. 꼭대기에는 지붕돌과 한돌로 이루어진 복발(覆鉢:엎어놓은 그릇모양 장식)이 놓여 있는데, 아래위로 구슬을 꿴 모양을 장식하고, 가운데에는 연꽃무늬를 두었다.
부도의 앞에는 직사각형의 한 면에 ‘혜거탑’이라 새겨 부도의 주인공을 알려주고 있다. 부도를 구성하고 있는 각 부분의 수법과, 조형방식으로 보아 조선시대 전기에 세운 것으로 보인다.
2.약수선원 목조보살입상
종 목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76호
지 정 일 2001.05.17
소 재 지 경기 의정부시 호원동 226-54
시 대 조선시대
옛부터 영험있는 약수로 유명한 의정부 약수선원 관음전에 모셔진 서 있는 모습의 보살상이다. 이 보살상은 1897년에 지리산 유역의 경상도 사찰에서 이곳으로 옮기면서 칠을 다시 했다. 그 이후에도 칠을 했는데, 이때 보살상에서 광무9년명다라니, 무구정광다라니경, 발원문 및 금판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아담한 크기의 이 보살상은 해충에 강한 은행나무로 만들어졌다. 머리에는 높고 화려한 보관을 쓰고 있으며, 둥글고 통통한 얼굴에 눈, 코, 입 등은 작은 편이다. 살짝 묶은 머리는 보관 아래로 내려와 어깨까지 흘러 내렸다. 어깨는 얼굴에 비해 좁고 쳐져서 왜소한 느낌이 든다. 팔찌로 장식한 오른손은 엄지와 검지를 맞대어 들고 있고, 왼손은 아래로 내려뜨린 손모양을 하고 있다. 양어깨에 걸쳐 입은 옷은 자연스러운 옷주름을 만들며 팔을 휘감고 발 아래까지 흘러 내렸는데, 가슴 밑으로 옷띠매듭이 보인다.
대세지보살로 생각되는 이 보살상은 머리를 묶은 모습이나 다른 장식적인 면의 표현, 신체비례 등으로 보아 16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3.하석 박정 영정
종 목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77호
지 정 일 2001.09.17
소 재 지 경기 의정부시 장암동 197
시 대 조선시대
조선 중기의 문신 박정(1629∼1703)의 초상화 2점이다. 박정은 광해군 11년(1619)에 문과 시험에 합격하고 여러 벼슬을 두루 거쳤는데, 남원부사로 있을 때에는 선정을 베풀었다고 한다.
2점의 초상화 가운데 하나는 낮은 사모를 쓰고 푸른색 관복을 입은 모습으로, 고개를 오른쪽으로 약간 돌려 왼쪽 얼굴을 그렸다. 전체적으로 얼굴에 비하여 몸체가 너무 크고 화면의 일부가 떨어져 나간 듯 구도가 어색하나 옅은 갈색을 사용한 얼굴 묘사는 매우 섬세하다. 특히 수염이나 눈썹의 표현은 매우 섬세하여 성격까지도 나타나도록 표현하였다. 화면의 아래 부분에는 양탄자가 그려져 있다.
가슴에 있는 흉배에는 정3품 흉배에 그려지는 새인 백한이 그려져 있다. 이것으로 보아 이 그림은 1623년 박정이 인조반정에 참여한 공으로 공신이 되어 정3품 벼슬을 하였을 때 그려진 것으로 보인다. 얼굴 부분과 몸체 부분의 바탕이 서로 다른 천으로 되어 있고 얼굴 표현과 몸체를 비롯한 화면 아래부분의 표현 방식에 차이가 난다. 먼저 그려진 얼굴부분을 토대로 나중에 천을 이어 붙이고 몸체부분을 그린 것으로 보인다.
다른 하나의 초상화는 녹색의 관복을 입고 호랑이 가죽을 깐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이다. 전체적으로 구름무늬가 들어간 짙은 녹색의 관복을 입고 백한이 있는 흉배를 하고 있으며 두발은 발받침대에 올려 놓았다. 이 그림 역시 낮은 사모와 흉배 등 조선 중기적인 표현 요소를 가지고 있으면서 표피를 깐 의자나 원근법에 의해 그려진 발받침 등 조선 후기의 표현 요소도 함께 가지고 있다.
4.회룡사 오층석탑
종 목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86호
지 정 일 2003.04.21
소 재 지 경기 의정부시 호원동 411
시 대 조선시대
신라 선덕여왕 6년(1632) 이곳 회룡사를 창건한 의상대사의 사리를 봉안했다는 전설을 지닌 탑니다. 6.25때 심하게 파손되어 옥개는 거의 완전한 것이 없고, 원래의 옥신과 상륜부 또한 없어졌다.
현재의 모습은 1979년 깨어지고 없어진 것을 새로 복원한 것으로 2,3,4층의 탑신과 1,3,5층의 옥개는 새로만든 것이며, 다른 층의 것들도 일부 보수되었다. 상면은 복련으로 닾었으며, 중석은 각 면을 3칸으로 구획했다. 옥신은 모두 각면을 3칸으로 구획하여 조각했다. 탑의 재료는 화강암이고 높이는 3.3m이다.
5.원효사 묘법연화경
종 목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96호
지 정 일 2004.11.29
소 재 지 경기 의정부시 호원동 229-149
시 대 조선시대
원효사는 신라 진덕여왕때 원효대사가 안거하며 수도 정진해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 인조 4년(1626년)에 한글로 필사된 묘법연화경은 2책 1권으로 만들어 졌는데. 글씨가 모범적이고 바르며 보존상태도 양호한 상태로 17세기초 유교적 규범이 엄격한 궁중상궁에 의해 작성한 공덕경이란점에서 귀중한 자료일 뿐 아니라 한글 표음법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6.정문부장군 묘
종 목 경기도 기념물 제37호
지 정 일 1977.10.13
소 재 지 경기 의정부시 용현동 379-32
시 대 조선시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뛰어난 공적을 세운 농포 정문부(1565∼1624) 장군의 묘이다.
선조 18년(1585)에 생원이 되고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선조 24년에 함경북도의 병마평사가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관북일대가 함락되자 이에 격분하여 의병을 일으켰다. 명천·길주 등에서 적을 물리치고 관북 지역을 되찾았으며 그 공을 인정받아 길주 목사가 되었다. 인조 때 이괄의 난에 연루되어 사망하나 후에 무죄가 증명되어 좌찬성으로 벼슬이 높여졌다.
부인 고령 신씨가 함께 묻혀 있는 합장묘이며, 봉분 앞에 묘비·상석·향로석이 있고 그 앞 좌우로 1쌍의 문인석이 서 있다. 묘역 동남쪽에 신도비(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 근처 길가에 세운 비)가 있는데 현종 6년(1665)에 세웠던 것을 철종 12년(1861)에 추가로 기록하여 다시 세운 것이다.
7.노강서원
종 목 경기도 기념물 제41호
지 정 일 1977.10.13
소 재 지 경기 의정부시 장암동 산 146-1
시 대 조선시대
조선 숙종 때 문신인 박태보(1654∼1689)의 학조선 숙종 때 문신인 박태보(1654∼1689)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박태보는 호남 암행어사, 파주 목사 등의 벼슬을 역임하였고 인현왕후의 폐위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심한 고문을 받고 진도로 유배가는 도중 죽었다. 학문에도 깊고 성품도 강직한 분으로 알려졌으며 죽은 뒤에 영의정에 임명되었다.
숙종 21년(1695)에 세운 이 서원은 숙종 27년(1701)에 국가에서 인정한 사액서원으로 ‘노강’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원래는 서울 노량진에 세웠으나 한국전쟁으로 소실되었고 1968년 지금 있는 자리로 옮겨 복원한 것이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폐쇄되지 않은 47개 서원 중 하나이다.
경내 건물로는 사당, 동재·서재, 고직사 등과 출입문이 있으며 교육장소로 사용되는 강당은 따로 두지 않았다. 사당은 박태보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건물로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으로 꾸몄으며, 각 칸에는 4짝으로 이루어진 문을 달았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새 날개 모양의 익공 양식을 사용하였는데 가운데 칸에 용머리를 첨가하였다. 동·서재는 온돌방으로 꾸며 유생들이 공부하면서 기거하는 건물이다. 앞면 3칸·옆면 1칸 규모로 앞에는 툇마루를 두었다.
해마다 3월과 9월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8.송산사지
종 목 경기도 기념물 제42호
지 정 일 1977.10.13
소 재 지 경기 의정부시 민락동 산 66-1
시 대 조선시대
송산사터는 조선의 개국에 참여하지 않고 고려 왕조와의 절개를 지킨 조견, 원선, 이중인, 김양남, 유천, 김주 등 여섯 분의 뜻을 기리고 제사를 지내기 위한 사당이 있던 터이다.
조선 정조 22년(1798)에 건립되 ‘삼귀서사’라 하였는데, 순조 3년(1803)에 ‘송산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러나 고종 5년 (1868)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건물은 헐려 없어졌고, 1892년 옛터 위에 여섯 분의 위패가 모셔진 단이 마련되었다. 1995년의 발굴조사 결과 재실의 남쪽에서 사당터가 확인되었다. 사당터는 북향으로 자리잡고 있어 고려의 왕도인 개성을 잊지 않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건물은 앞면 3칸·옆면 2칸의 규모이며, 지붕은 옆에서 보면 사람 인자 모양의 맞배지붕이다. 앞면에 개방된 툇간이 있으며 옆면과 뒷면에는 방화벽이 설치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송산사터는 전형적인 조선 후기의 소규모 사당터이나 배치가 북쪽을 향해 있어 매우 특이한 유적이다.
9.신숙주선생 묘
종 목 경기도 기념물 제88호
지 정 일 1985.09.20
소 재 지 경기 의정부시 고산동 산53-7
시 대 조선시대
조선 초기의 대학자이며 문신이었던 보한재 신숙주(1417∼1475) 선생의 묘이다.
세종 20년(1438)에 사마양시에 합격한 후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쳤으며, 세종 25년(1443)에는 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세조가 즉위한 뒤 예문관대제학, 우의정, 좌의정을 지냈으며 예종 1년(1471)에는 영의정에 올랐다.
훈민정음을 창제하는데 참여하여 큰 공을 세웠으며, 왕명으로 명나라 황찬의 도움을 얻기 위해 요동을 13차례나 왕래하기도 하였다. 특히 세조와는 이전부터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계유정난 과정에서도 세조에 협조적인 자세를 취하였다. 그는 뛰어난 학식과 글재주로 모두 6명의 임금을 섬기면서『국조오례의』,『동국통감』,『세조실록』,『예종실록』을 비롯한 많은 편찬사업에도 참여하였다.
묘는 부인 안씨와의 합장묘이며 봉분은 2기가 있다. 봉분 사이에는 1897년에 세운 묘비가 있고, 앞에는 상석과 향로석이 있다. 봉분 좌우에는 문인석 2쌍이 서 있다. 묘역 아래에는 이승소가 글을 지어 성종 8년(1477)에 세운 신도비(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 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 근처 길가에 세우던 비)가 있다.
10.망월사 천봉당 태흘탑
종 목 문화재자료 제66호
지 정 일 1985.09.20
소 재 지 경기 의정부시 호원동 산91
시 대 조선시대
망월사 범종각 아래쪽에 자리하고 있는 탑으로, 조선시대 승려인 천봉당 태흘(1710∼1793)의 사리를 모셔두고 있다.
태흘은 16세에 출가하여, 명탁의 제자가 되었고, 도원으로부터 승려가 지켜야 할 계율을 받았다. 20세에 호점에게서 불경을 배워, 배천의 호국사에서 깨달음에 이르렀으며, 정조 17년(1793)년 84세로 목숨을 다하였다. 이 후 배천 호국사, 문화 월정사와 함께 이곳 망월사에 사리탑을 세워 그 유골과 사리를 모셔두었다.
탑은 넓은 바닥돌 위로 기단을 두고, 탑신을 올린 모습으로, 바닥돌을 제외한 각부분이 8각을 이루고 있다. 기단은 각 모서리마다 다섯 개의 구슬무늬를 세로로 두어 장식하였다. 길쭉한 탑신의 몸돌은 아래에 작은 잎의 연꽃을 두르고, 윗부분에는 큼직한 잎을 가진 연꽃을 둘러 새겼다. 가운데 부분에는 탑의 이름과 함께 조성연대를 세로로 기록해 두었다. 지붕돌은 윗면의 여덟 모서리가 꽤 두툼하게 표현되었고, 역시 두꺼워 보이는 처마는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고 있다. 꼭대기에는 연꽃을 새긴 둥근 돌 위로, 꽃봉오리 모양의 돌이 놓여 머리장식을 하고 있다.
탑에 새긴 기록으로 보아 조선 정조 18년(1794)에 세웠음을 알 수 있다. 탑 뒤쪽에는 가파른 암벽이 드리워져 있는데, 그 벽면에 탑을 세울 당시 시주를 했던 사람들의 명단이 적혀 있어 이 자리가 원래의 자리임을 말해주고 있다.
11.망월사 천봉선사탑비
종 목 문화재자료 제67호
지 정 일 1985.09.20
소 재 지 경기 의정부시 호원동 산91
시 대 조선시대
조선 후기의 승려인 천봉선사 태흘(1710∼1793)의 탑비로, 옆에는 그의 사리를 모신 부도(경기도문화재자료 제66호)가 함께 자리하고 있다.
태흘 선사는 16세에 유덕사라는 절에 들어가 명탁의 제자가 되었다. 20세 때 우점에게 배운 뒤 여러 곳에서 참선하였으며 백전 호국사에 들어가 풍계선사의 뒤를 이었다. 입적한 다음해에 호국사, 월정사, 망월사 등에 선사의 사리탑을 세웠다.
비는 네모난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지붕돌을 얹은 간단한 모습이다. 조선 정조 21년(1797)에 비를 세워 놓았으며, 비문은 이충익이 글을 짓고 글씨를 썼는데, 단아한 필체가 돋보인다. 비의 뒷면에는 그의 동문과 제자 및 신도들의 이름이 적혀 있다.
12.서계 박세당 사랑채
종 목 문화재자료 제93호
지 정 일 2000.04.17
소 재 지 경기 의정부시 장암동 197
시 대 조선시대
조선 후기 실학자 서계 박세당(1629∼1703) 선생이 저술 활동을 하던 건물이다.
선생은 조선 현종 1년(1660) 과거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자리에 올랐으나 40세에 관직을 그만두고 이곳에서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힘썼다. 또한 직접 농사를 지으면서 체험한 것을 토대로 그의 대표적인 농학서 『색경』을 저술했다.
처음에는 안채와 안사랑, 바깥사랑, 행랑채를 갖춘 조선 후기 사대부가의 규모였으나, 한국전쟁 때 대부분 소실되고 현재는 바깥 사랑채만 남아 있다.
사랑채 규모는 앞면 5칸·옆면 2칸 반으로 누마루가 덧붙어 있어 乙자형 구조로 되어 있다.
사랑채는 동쪽의 수락산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서향집에서 왼쪽을 향하고 있다. 보통 좌향의 배치에서는 남향이나 남서향, 남동향을 따르는 것에 비해 이 가옥은 방향보다 배산임수의 자연지세에 따라 배치한 것으로 보인다.
13.의정부2동성당
종 목 문화재자료 제99호
지 정 일 2001.01.22
소 재 지 경기 의정부시 의정부2동 429-6번지
시 대 일제강점기
구한말~1945년 : 구한말 우고리(양주군 광적면)와 신암리(연천군 남면) 일대에 박해를 피해 집단으로 공동체를 이루며 도자기를 굽던 교우촌이 형성되었으며, 1927년에 개성본당의 신암리공소가 본당으로 승격되었고, 1934년에는 덕정리본당(양주군 회천면 덕정리 역전 위치)이 완공되었는데, 이것이 의정부성당의 전신이다.
1945년에는 덕정리에서 의정부리로 성당 소재지를 옮겼다. 당시 대지 1,625평을 매입하는 한편, 25평 정도의 한옥 1동을 매입, 수리하여 임시 성당과 사제관으로 사용하였으나 한국전쟁때 소실되었다. 1953년 : 이계광(요한) 신부가 현재의 성당을 건립. 성당 건립 때에 이계광 신부는 당시 의정부에 주둔하고 있던 주한 미1군단의 군종 신부인 로제스키 신부의 협조를 받아 미1군단 카톨릭신자의 헌금을 성당 건립비로 지원받았다. 이 사실은 성당 입구에 남아있는 명판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본 성당은 석조로 구축되었다. 조적조 외벽의 경우 대부분 적벽돌이 사용되었으나,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화강석을 사용한 예가 있다. 의정부2동성당의 경우 공사비 견적 결과 적벽돌보다 석재가 더 저렴한 것으로 판정되어 석재를 사용한 것으로 증언하고 있다. 본 성당은 회천면 덕정리 돌산에서 채석하여 의정부지역에서 활동하던 석공들에 의해 건축되었는데, 그 무렵에 지어진 양주군청사에서도 석재의 크기나 다듬기 등에서 동일한 수법이 나타난다. 일반적으로 50년대를 전후한 시기의 성당건축은 내부의 열주가 사라지고 수직 수평의 분절이 약화되어 일제시대보다 훨씬 단순하고 일률적인 경향을 갖지만 외관 특히 종탑과 정면의 양식적 형태와 상세는 고수된다. 이러한 유형을 양식 변형 양옥성당이라고 하며, 특히 전쟁을 거치면서 교회에 대한 천주의 보호, 즉 견고함이 새삼 강조되어 석재를 사용하여 성채와 같이 표현되기도 하였다.
의정부2동성당은 이러한 시대적 특징을 갖추고 있는 사례로 평가된다.
14.서계 박세당 묘역
종 목 문화재자료 제113호
지 정 일 2002.09.16
소 재 지 경기 의정부시 장암동 산146-1
시 대 조선시대
서계 박세당(1629~1703)은 조선 후기 중농주의 실학자로서 그 역사적 업적이 뛰어나다. 참판 박정의 아들로 1660년에 증광문과에 장원급제하여, 1664년 황해도 암행어사로 나갔다. 1667년 이조좌랑이 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아 장형을 받기도 했으나 1694년 갑술옥사에 소론이 득세하자 승지로 특진하였다. 이러서 공조판서를 거쳐 이조,형조판서를 지냈다.
서계 박세당의 묘는 장암동 소재 석천동 북족 언덕에 위치하고 있으며, 봉분은 단 분으로 두 부인과 삼위합장묘이다.
15.회룡사 석조
종 목 문화재자료 제117호
지 정 일 2003.04.21
소 재 지 경기 의정부시 호원동411
시 대 조선시대
회룡사의 누각 아래에는 거대한 석조가 있다. 돌로 만든 수조를 석조라 부르는데 물을 저장하여 사용하는 석조는 예로부터 사찰의 필수품이다. 총길이가 244cm이고 폭이 153cm, 깊이가 67cm, 돌의두께가 21cm나 되는 이 거대한 장방형석조는 서울 근교에서는 가장 큰편에 속한다고 할수 있다.
전체적으로 잘 치석하여 표면이 매끈하게 처리되어 있고, 바닥으로 내려가면서 완만하게 내곡을 이루어 시작적으로 안정되게 보이고 있다. 물이 흘러내리는 주구도 끝을 부드럽게 처리하였고 물이 흘러내리는 홈도 매근하게 만들어 석조의 분위기를 잘 살려내고 있다.
이런 석조는 서산 보원사지 석조에 버금갈 만한 것이며 관악산 삼막사 석조보다는 다소 큰 것으로 서울 인근 석조로서는 보기 드문 석조라 할 수 있고 만든 솜씨도 뛰어나 석조연구에 중요한 작품으로 판단된다.
16.회룡사 신중도
종 목 문화재자료 제118호
지 정 일 2003.04.21
소 재 지 경기 의정부시 호원동 411
시 대 조선시대
회룡사의 신중도는 가로 219.5cm, 세로 176cm나 되는 꽤 큰폭의 그림이다. 앞줄 중앙에 위태천, 뒷줄 좌우에 제석, 범천이 배치되어 있고, 그 주위로 제석, 범천의 권속과 팔부중이 배치된 꽉 찬 화면도구를 보여주고 잇다. 형태는 늘씬하면서도 경직된 면이 보이는 신체와 19세기 말에 유행하던 특유의 얼굴을 나타내고 있다.
신중들의 옷은 주로 분홍색에 가가운 옅은 붉은 색으로 되어 있는데 군청과 녹색들이 약간씩 가미된 19세기 후반시 채색을 칠해 당대 신중탱화의 특징이 잘 나타나고 있다. 특히 서울 근교의 불화 양식이 잘 표현 되어 있는 이 신중도는 서울 동작 지장사 신중도와 친연성이 짙은것으로 당대의 신중도 가운데 대표적인 예로 평가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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