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 사제열전

윤형중 신부(상)

namsarang 2010. 5. 2. 10:51

[한국교회 사제열전]  

 

윤형중 신부(상)


   1956년 4월 10일. 서울교구에서 발행하는 「경향잡지」 책임을 맡고 있던 윤형중 신부는 평소보다 닷새나 빨리 원고를 마감하고 조심스럽게 인쇄소에 내려보냈다. 잡지가 나오자 특별히 꼼꼼하게 포장해 지방으로 발송했다. 여느 때에 비해 일주일이나 빠른 발송이었다.

 잡지에는 당시 민주당 소속으로 부통령 후보에 출마한 장면(요한) 박사에게 투표해줄 것을 신자들에게 호소하는 글이 14쪽에 걸쳐 실려 있었다. 윤 신부는 14쪽 분량을 하룻밤에 다 써서 눈치채지 않게 인쇄해 독자들에게 배달되게 한 것이다.

 윤 신부는 끝 부분을 이렇게 썼다. "…다시금 말하거니와 이것은 장면 박사 개인을 위함이 아니라 우리나라와 민족이며 우리 한국 가톨릭을 위함이다. 이것이 가톨릭운동이요, 이것이 훌륭한 전교운동이다…."

 당시 집권 자유당이 온갖 선거부정을 저지르며 자유당 부통령 후보가 100만 표 차 이상으로 이길 것이라고 장담했지만 선거 결과는 장면 박사가 20만 표 차로 부통령에 당선됐다. 예상하지 않은 결과였다. 윤 신부가 「경향잡지」를 통해 호소한 것이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보통학교에 다니던 어린 시절 종교 토론에 나가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상대방을 납작하게 만들었던 윤형중 신부였다. 그런데 사제가 돼서는 명강연가로서뿐 아니라 명문필가로서 한국 가톨릭의 대표적 지성으로 이름을 날린 이가 또한 윤형중 신부였다.

 그의 말에는 상대방을 압도하는 힘이 있었고, 그의 펜에는 읽는 이들의 마음을 울리고 머리를 끄덕이게하는 진실과 열정이 있었다. 그는 옳다고 판단한 것은 과감히 결행했다. 그래서 때로는 반대받는 표적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결코 자신을 위해 살지 않았다. 하느님을 위해 살았고 복음을 위해 살았다. 사제가 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윤 신부와 시대를 함께 많은 이들에게 윤 신부는 선구적 가톨릭 지성으로 기억된다. 윤 신부 자신도 이를 부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그의 자랑거리가 아니었다. 그가 목표로 한 것은 자신이 아니었다. 하느님을 전하고 가톨릭교회를 알리는 것이었다. 진실을 밝히고 정의를 실천하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전교를 위해서였다.

 윤형중 신부는 1903년 4월 29일 충북 진천군 백곡면 용진동에서 윤관병(베드로)과 고 마리아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형제는 모두 6남 3녀였지만 아들 하나와 딸 하나는 어려서 죽어 5남 2녀가 됐다. 윤 신부는 증조부가 병인박해 때 수원에서 순교한 윤자호(바오로)로, 순교자 집안이었다. 소설 「은화」 저자 윤의병(바오로, 1889~1950) 신부가 5촌 당숙이다. 어머니 고 마리아는 수녀가 되고 싶었으나 부모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윤씨 집안으로 시집 왔다.
 윤 신부는 5살 때 안성으로 이사한 후 보통학교인 안법학교를 마치고 1917년 9월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 입학했다. 열심한 교우 집안이어서 어려서부터 받은 철저한 신앙교육, 본당신부이자 안법학교를 세운 공베르 신부의 모범과 교육, 자신이 못 이룬 수녀의 꿈을 아들이 대신 이뤄주기를 바라는 어머니의 깊은 신앙과 기도, 5촌 당숙 윤의병 신학생 등이 윤 신부의 신학교 결행에 영향을 미쳤다.

 13년간 소신학교와 대신학교 생활을 마치고 윤 신부는 1930년 10월 26일 명동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입학 동기는 68명이었으나 사제수품 동기는 10명이었다. 노기남 대주교, 방유룡 신부, 양기섭 신부가 그들이었다.

 윤 신부는 약현본당 보좌를 거쳐 1933년 서울교구 출판부 보좌로 전임됐다. 그해 6월 「가톨릭청년」이 창간되면서 편집주간을 맡은 윤 신부는 1936년 12월 「가톨릭청년」이 사정상 정간되자 1937년부터는 당시 서울교구에서 발행하던 「경향잡지」 편집장을 맡았다. 「경향잡지」는 광복 직전인 1945년 5월 폐간됐으나 이듬해에 다시 속간됐고, 이때부터 윤 신부는 주필 겸 발행인을 맡아 1959년 「경향잡지」가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CCK)로 넘어갈 때까지 함께 했다.

 1925년 기해ㆍ병오박해 순교자 79위가 시복되면서 한국교회에서는 순교자 현양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을 뿐 아니라 순교자 현양운동을 조직적으로 펼쳐야 한다는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순교자의 후손인 윤 신부 역시 이미 신학생 때부터 순교자들을 현양하는 것은 신자들에게는 순교정신을 보급시키는 것이고 미신자들에게는 진리의 횃불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경향잡지」 편집 책임을 맡던 1937년 윤 신부는 1939년 기해박해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순교기념탑 건립을 구상한다. 명동대성당 언덕에 기념탑을 세우면 교우들에는 물론이고 전교에도 영향을 미치리라고 본 것이다. 「경향잡지」를 통해 기념사업의 당위성을 줄기차게 역설했다. 사방에서 의연금이 들어왔고 1939년에는 2만 원이 모였다. 그러나 기금은 지방 땅을 사는 다른 용도로 사용됐고, 윤 신부의 구상은 실현되지 못했다. 
                                                                                                                                                               이창훈 기자 / changhl@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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