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무산되기는 했지만 순교기념탑 건립 구상은 순교자 현양에 대한 깊은 관심과 또 이를 통한 복음화 곧 전교에 대한 열정을 보여준 일화다.
윤 신부는 기해박해 100주년인 1939년에 또 다른 일을 추진했다. 순교자 현양 사업을 조직적으로 펼치고자 전국 차원의 순교자현양회를 만들고자 한 것이다. 서울교구장의 허락을 받은 후 뜻을 함께 하는 사제, 평신도로 설립위원들을 구성하고 취지문과 규칙서도 만들었다. 경찰에도 알려 일차 허락을 얻었다. 외국인 교구장들은 아직 시기가 아니라며 부정적 입장을 보여 주춤하기도 했지만 우여곡절을 거쳐 발족식 날짜까지 잡았다. 하지만 발족식 불과 이틀 전에 일본경찰이 다시 허락을 불허해 무산되고 말았다.
순교자현양회는 광복되고 난 이듬해인 1946년 9월 16일 복자 김대건 신부 순교 100주년 기념일에 공식 발족했고, 윤 신부는 중앙위원회 위원장에 선출됐다.
오늘날 서울대교구 한국순교자현양위원회가 이렇게 해서 출발하게 된 것이다. 김대건 신부 축일을 1급 축일로 올리면서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로 모시게 된 것도 순교자현양회의 발의로 이뤄진 일이었다. 오늘날 김대건 성인 축일이나 순교자성월이 되면 널리 부르는 「가톨릭성가」 '성 안드레아 김대건 신부 노래'와 '순교자 찬가'가 발표된 것도 이때였다. 윤 신부가 가사를 시인 최민순 신부에게 부탁하고 곡을 작곡가 이문근 신부에게 의뢰해 만든 성가들이었다.
순교자 현양에 대한 윤 신부의 관심과 열정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박해 시대 신앙선조들이 사용하던 신앙서적을 비롯해 묵주와 십자고상과 패 같은 각종 성물들을 수집하고 「경향잡지」를 통해 그 경위를 소개했다. 또 순교자 현양을 독려하는 글들을 실어 신자들에게 순교자 현양 정신을 고취시키는 데 힘을 쏟았다. 서울의 대표적 순교성지들인 절두산 순교성지와 새남터 순교성지의 터를 마련한 것도 모두 윤 신부가 중앙위원회 위원장으로 있었던 당시 순교자현양회가 전국적 기부금 모금을 통해 이룩한 결실이었다.
기해박해 100주년을 기념해 명동성당 언덕에 순교기념탑을 세우려는 계획을 갖고 추진했다가 뜻을 이루지 못한 윤 신부는 1958년 병인박해 100주년(1966년)을 미리 내다보면서 또 다른 거창한 일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서울의 대표적 순교지에 속하는 서소문 네거리에 순교기념관을 건립한다는 계획이었다.
기념관은 어떻게 꾸미며 관리는 어떻게 한다는 구체적 복안까지 마련한 윤 신부는 「경향잡지」를 통해 이런 취지를 알리면서 협조를 구했다. 인천 답동, 경남 진해, 부산 대청동, 서울 가회동 등 본당들의 동참이 잇따랐고, 부산교구와 광주교구는 교구 공문을 통해 교우들에게 적극 협조를 호소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같은 계획은 이듬해인 1959년 5월 윤 신부가 순교자현양회 중앙위원장과 「경향잡지」 발행인에서 미리내본당 주임으로 전보되면서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윤 신부는 훗날 "서소문 사거리 터를 잡지 못한 것은 서울교구의 크나큰 수치라 아니할 수 없다"고 회고했다.
앞에서도 잠시 언급했지만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윤 신부가 순교기념탑이나 순교기념관 건립을 추진하고자 한 목적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순교자 현양사업이 순교자의 후손된 신앙인들로서 마땅한 도리일 뿐 아니라 이를 통해 신자들의 신앙과 순교정신을 고취시킬 수 있다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한 점이 있었다. 윤 신부에게 그것은 전교였다.
명동 언덕에 명동성당과 조화를 이루며 서 있는 순교기념탑은 명동을 찾는 미신자들에게 천주교를 알리는 더없이 좋은 기회가 된다. 서소문 순교기념관도 마찬가지였다.
윤 신부는 국립박물관 못지 않은 규모의 순교기념관이 건립되면 관람객이 끊이지 않을 것이고 대학생들을 비롯한 지식들의 발걸음도 이어질 것으로 내다봤다. 그래서 순교기념관은 "전교상 가톨릭종합대학 이상의 효과를 낼 것이 확실하다"고 판단했다.
윤 신부가 본당사목자로서 사제 생활을 했다면 달랐을지 모른다. 하지만 윤 신부는 사제수품 후 약현본당 보좌 3년과 가회동본당 초대 주임 1년(1949~1950), 미리내본당 주임 1년 반(1959~1960)을 제외하면 사제 생활의 거의 대부분을 교회 언론과 출판 분야에서 지냈다. 20년 가까이 「경향잡지」 주간과 발행인을 지냈을 뿐 아니라 1947년 「가톨릭청년」이 속간되면서 1960년까지 책임을 맡았고, 1946년 '경향신문'이 창간되면서 부사장과 사장을 지내는 등 가톨릭 매스컴의 중심에 있었다.
이런 직책이 윤 신부가 교회와 사회 현실을 진단하고 앞날을 전망하는 데, 또 예리한 필설을 휘두르는 데 당연히 큰 도움이 됐을 것이다. 순교기념탑이나 순교기념관을 전교의 탁월한 수단으로 여길 수 있었을 것이다. 윤 신부는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한국 교회를 위해, 하느님 사업을 위해 필요한 일이라고 본 것이다. 이창훈 기자 changhl@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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