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100년전 우리는

[109] 외교권 침탈에 맞선 이한응과 이범진

namsarang 2010. 5. 4. 22:56

  [제국의 황혼 '100년전 우리는']

 

[109] 외교권 침탈에 맞선 이한응과 이범진

 

전봉관 KAIST 교수·한국문학

 

1905년 을사늑약 체결로 외교권을 박탈당할 때까지 한국은 청·일본·미국·러시아·영국·프랑스·독일 등 9개국에 외교공관을 개설했다. 이는 한국이 독립국임을 보여주는 강력한 징표였다. 본국에서 공관 운영비를 제대로 보내지 않아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한국 외교관들은 국권을 지키기 위해 다양한 활동을 벌였다.

일본한국의 해외공관 폐쇄 절차에 착수한 것은, 1904년 8월 제1차 한일협약 체결 직후부터이다. 외교관을 소환하고, 공관에 송금을 끊는 방식이 동원되었다. 9개월 동안 공관 운영비와 봉급을 받지 못한 주미(駐美) 대리공사 신태무는 주미 일본공사와 미국 국무부를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다.

주영(駐英) 대리공사 이한응(李漢應·1874~1905)〈오른쪽 위 사진〉은 영국 외무부를 상대로 '한국에서 일본의 우월한 지위'를 인정한 영일(英日)동맹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한국의 독립 보장을 요구했다. 영국 외무부가 냉담한 태도로 일관하고, 객지에서 신병(身病)까지 얻게 되자, 그는 1905년 5월 애끊는 유서를 남기고 목을 매 자결했다.

"슬프다. 나라는 주권이 없어지고 사람은 평등을 잃어버려 모든 외교에 치욕이 망극하니 진실로 핏기를 가진 이면 어찌 이를 참을 수 있으리오. 슬프다. 종묘사직이 폐허가 될 것이요, 민족이 장차 노예가 될 것이라. 구차히 살자 하면 욕됨만 더하리니 눈감아 잊어버리는 것이 나으리로다."(이한응의 유서)

일본 외무성은 을사늑약 체결 직후 주재국 정부를 통해 한국 공관 폐쇄를 요구했다. 한국 외교관들이 본국의 훈령이 없다는 이유로 이를 거부하자, 12월 외부대신 이완용 명의로 폐쇄 훈령을 내렸다. 주일공사 조민희, 주독공사 민철훈, 주미대리공사 김윤정, 주청(駐淸)대리공사 박태영은 훈령에 따라 공관 기록과 재산을 주재국 일본공사에게 넘기고 귀국했다. 주불(駐佛)공사 민영찬은 고종의 밀명을 받고 워싱턴을 방문해 미국 국무장관에게 을사늑약의 무효화를 위한 도움을 구했지만, 아무런 대답도 듣지 못했다.

주러공사 이범진(李範晉·1852~1911)〈오른쪽 아래 사진〉은 소환에 응하지 않고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남아 항일 운동을 전개했다.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고종의 밀사 이상설과 이준이 그를 찾아오자, 이범진은 탄원서 작성을 도왔고 아들 이위종을 밀사의 일행 겸 통역으로 동행시켰다.

이범진은 주러공사관 재산과 사재를 정리해 연해주와 샌프란시스코 일대 항일 운동 단체를 지원하고, 강제합방 이듬해 손에 권총을 쥔 채 목을 매 자결했다. "친애하는 황제 폐하. 우리의 조국은 패망했습니다. 폐하께서는 모든 권력을 빼앗기셨습니다. 적을 벌할 수 없는 저는 비통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자결로 목숨을 끊는 수밖에 도리가 없습니다. 저는 오늘 그 일을 하려 합니다."(이범진이 고종에게 남긴 영문 전보)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는 이범진이 상주했던 건물〈왼쪽 사진〉(이 건물 3층에서 집무)이 아파트로 변한 채 남아있고, 그의 순국비도 세워졌다. 2008년 9월 러시아를 방문한 이명박 대통령은 순국비에 참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