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100년전 우리는

[107] 항일논객 박은식과 신채호

namsarang 2010. 5. 2. 15:47

  [제국의 황혼 '100년전 우리는']

 

[107] 항일논객 박은식과 신채호

  • 정진석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언론정보학

 

1909. 8. 29.~1910. 8. 29.

박은식과 신채호는 독립운동가이자 사학자이면서 언론인이다. 두 사람은 대한매일신보(이하 신보)와 황성신문에서 번갈아 붓을 잡아 우국의 논설을 쓰고, 역사 지식을 보급하여 애국사상을 고취하기 위해 노력했다. 합방 후에는 만주·블라디보스토크 등지로 떠돌면서도 항일의 붓을 놓지 않았으며 광복을 보지 못한 채 이국 땅에서 생을 마치는 공통점을 지녔다.

박은식(朴殷植·1859∼1925)〈큰 사진·오른쪽에서 세번째〉(1920년 이승만 임시정부 대통령 부임 환영회. 오른쪽 두 번째부터 신규식 박은식 안창호 이승만 이동휘 이시영 이동녕 손정도)은 1898년 9월 황성신문이 창간될 때부터 언론활동을 시작했다. 장지연이 을사늑약에 반대하는 논설 '시일야방성대곡'(1905.11.20.)을 썼다가 신문이 정간당하자 박은식은 신보로 옮겨간다.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박은식이 본래 경서에 관한 학문을 좋아하였고 또 신학에도 지식이 풍부하여, 무슨 일을 논할 때 그 근거가 확실하여 장지연과 백중지세를 이루었다"고 평했다.

박은식은 1907년 11월 황성신문으로 돌아간 뒤 '서우(西友)' '대한자강회월보' 등을 편집하고 잡지에 애국 계몽사상을 고취하는 많은 논설을 발표했다. 이듬해 '서북학회월보'의 주필도 맡았다. 합병 후 망명길에서 '안중근'과 '한국통사'(1914년)를 완성하였고, 상해에서 '향강잡지(香江雜誌)'(1913), '국시일보(國是日報)'(1916)를 편집했으며,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는 '한족공보(韓族公報)'(1918)를 발행했으나 모두 오래가지는 못했다. 1924년 말 상해 임시정부의 '독립신문' 사장을 맡았고, 곧 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에 추대되었다. 사학과 언론을 수단으로 구국 독립의 이상을 구현하려 했던 우국지사였다.

신채호(申采浩·1880∼1936)〈작은 사진〉도 두 신문에서 서릿발 같은 항일 논설을 집필했던 논객이었다. 26세였던 1905년 장지연의 초청으로 황성신문에 입사하여 붓을 잡았다가 1907년 11월 초 신보로 옮겨갔다. 신채호는 '준열한 필봉과 웅대 유려한 문장'(조선일보, 옥중 회견기, 1931. 12.19.)으로 이름이 높았다. 일진회에 가담한 친일파와 두 친일지 '국민신보'와 '대한신문'을 비판하는 글을 신보에 쓰고 '수군의 제일 거룩한 인물 이순신'(한글판, 1908.6.11.~10.24.)을 연재했다. '동국에 제일 영걸 최도통(崔都統:崔瑩)전'(1910.3.6 ~3.24)은 연재 도중 끝을 맺지 못한 채 망명의 길에 올랐다. 두 소설은 금서가 되었던 자신의 책 '을지문덕'과 같은 취지로 쓴 구국의 영웅전이었다. 역사의 영웅을 널리 알려 미래의 영웅을 부르려 했던 것이다.

1910년 망명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대양보'(1911)와 '권업신문'(1912)의 주필로 활동하였고, 1919년에는 상해에서 '신대한'을 창간하여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을 비판하였다. 망명 중이던 1928년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10년 형을 선고받고 뤼순 감옥에 복역 중인 1931년 6월 10일부터 조선일보에 '조선사'와 '조선상고문화사'를 연재하였는데 10년 형기를 마치기 전에 옥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