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략의 검은 구름이 대한제국의 하늘을 뒤덮던 시기 항일언론의 본산은 대한매일신보(이하 '신보')였다. 비장한 어조로 일제의 침략을 폭로하고 무능한 정부를 꾸짖으면서 때로는 신랄한 해학으로 시국을 풍자했다.
"본보를 창설한 후로 한 자루 붓 칼을 갈아서 간활한 마귀를 토멸(討滅)하고 요괴로운 것을 쓸어버려 동포로 하여금 그 머리에 대한(大韓) 하늘을 이고 그 발로 대한 땅을 밟으며 그 눈으로 대한 일원을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혈성(血誠)으로 맹세했다."('신보', 1909.8.31., '붓을 들어 크게 호령하다')
이 신문을 통해 국민의 피를 끓게 했던 구국의 논객은 누구였을까. 신보는 한글판·국한문판·영문판 등 3종의 신문을 동시에 발행했다. 일제 통감부는 이 신문의 '한국인 선동자(Korean agitators)'들이 일본과 도저히 융화할 수 없는 논조로 선동을 일삼는다며(서울 프레스, Incendiary Journalism in Korea, 1908.5.), 양기탁·박은식·신채호 등을 '선동자'로 지목했다.
이 중 양기탁(梁起鐸 · 1871.4.2.∼1938.4.19.)〈사진〉(맨앞의 인물· 1907년경 편집진과 함께 찍은 사진)은 신보 등 3개 신문 발행의 중심인물이다. 그는 언론투쟁과 동시에 국채보상운동을 벌이면서 신보사를 비밀결사 신민회의 본거지로 삼아 침략에 저항한 행동파였다. 어려서는 한학을 공부했고 영어와 일본어도 능통했다. 미국 선교사 게일(Gale)의 '한영자전' 편찬에 참여했고, 1895년 무렵 일본으로 건너가 나가사키(長崎)상업학교에서 2년간 한국어를 가르친 경력이 있다. 또 서양 사람들과 긴밀한 교류를 통해 폭넓은 식견을 갖추었다.
1908년 6월 배설(裵說·Bethell) 재판에 증인으로 출두한 양기탁은 통감부가 증거물로 내놓은 신보의 항일 논설에 대해 "모두 내가 쓴 것"이라고 진술했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지만, 자기 한 몸을 희생시켜 박은식 신채호 등 논객들을 보호하려 했던 것이다. 한일 강제합방 후 일제는 보안법 위반 혐의로 양기탁을 투옥했다가 다시 신민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게 하는 등 끈질기게 탄압했다.
신문을 통해 국민의 독립사상을 고취했던 양기탁은 나라가 망하자 만주로 망명하여 해외에서 일제와 싸웠다. 신문과 잡지를 발행해 민족계몽에 힘쓰는 한편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령으로 활동했다. 항일운동에 모든 것을 바친 그는 중국 땅에서 병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