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100년전 우리는

[104] 조선을 발판으로 중국을 삼킨 원세개

namsarang 2010. 4. 29. 22:54

  [제국의 황혼 '100년전 우리는']

 

[104] 조선을 발판으로 중국을 삼킨 원세개

  • 전봉관 KAIST 교수 한국문학

1909. 8. 29.~1910. 8. 29.

'중화민국 제1대 대총통 선거는 지난 6일 북경에서 거행하여 원세개 씨가 피선되자 이어 열국은 즉시 공식 승인의 절차를 행하여 중화민국의 공화정부는 이에 비로소 안과 밖으로 완전히 성립되어 4천년 지나 역사에서 광채를 드러내며 4억 대륙민족은 한목소리로 공화를 노래하게 되었더라.'('권업신문', 1913. 10. 19.)

1912년 청국의 마지막 총리대신 원세개(袁世凱·1859~1916)는 황제를 퇴위시키면 중화민국 대총통으로 추대하겠다는 국민당 손문(孫文)의 제안을 받아들여 청국을 붕괴시키고 공화정의 초대 대총통으로 취임한다. 그 후 국민당마저 무력으로 제압해 1916년 초 중화제국의 황제로 등극한다. 그러나 열강의 압력과 민중 봉기, 부하들의 배신으로 83일 만에 스스로 황제직을 폐하고, 그해 6월 화병으로 죽는다.

1913년 대총통 시절 미국 사절단과 함께 찍은 사진

'난세의 간웅' '괴걸' 등으로 불리던 원세개의 출세의 발판은 조선이었다. 그는 하남성(河南省) 명문가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과거 공부에 매달렸지만, 두 차례 향시에 낙방한 후 서적을 불살라버리고 경군통령(慶軍統領) 오장경(吳長慶)에게 의탁한다. 1882년 오장경이 임오군란 진압을 위해 3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조선으로 파견되자, 원세개는 군수참모 격으로 동행한다. 원세개는 대원군 납치와 '반군' 소탕에 혁혁한 공을 세워 청국 정부로부터 정5품 동지(同知) 벼슬을 하사받는다. '명문가 문제아'가 조선에 발을 디딘 지 석 달 만에 관리가 되는 꿈을 이룬 것이다.

1885년 주차조선총리교섭통상사의(駐箚朝鮮總理交涉通商事宜)에 임명된 이후 '감국대신(監國大臣)'을 자처하며 식민지 총독처럼 조선 내정에 간섭했다. 말이나 가마를 타고 궁궐 문을 함부로 드나들었고, 조선 정부의 공식행사에서 언제나 상석에 앉았다. 고종이 왕비의 이종사촌인 김씨를 보내 아내로 삼게 하자, 원세개는 김씨뿐만 아니라 김씨가 몸종으로 데려간 이씨와 오씨까지 첩으로 삼아 조선 왕실을 모욕했다.

고종이 청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러시아와 밀약을 체결하자, 원세개는 고종을 폐위시키고 대원군의 장손 이준용을 국왕으로 앉힐 계략을 꾸몄다. 고종이 구미에 공사를 파견하려 하자, 그는 '조선 공사가 주재국에 도착하면 반드시 청국 공사와 함께 주재국 외교부를 찾아갈 것, 공석에서 청국 공사 뒤에 입장할 것, 긴요한 사건이 발생하면 청국 공사와 협의해 그의 지시에 따를 것' 등 소위 '삼단(三端)'을 요구했다. 그는 또 청국 상인의 조선 진출을 적극 도왔고, 밀수까지 눈감아주도록 세관에 압력을 넣었다.

청일전쟁의 패전으로 10년 만에 귀국한 그는 정치적 위기에 직면하지만, 조선에서 얻은 군무 전문가라는 명성으로 오히려 이홍장(李鴻章)의 추천을 받아 신식 군대 양성의 중책을 맡는다. 막강한 병권을 바탕으로 직예총독 겸 북양대신, 내각총리대신 등으로 영전을 거듭한 그는 황제가 되기 위해 일본의 '21개조 요구'를 받아들여 중국을 '반(半)식민지'의 나락에 빠뜨린다. '근대 중국의 횡령자' '나라를 훔친 대도(大盜)'라는 오명이 그에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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