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도량형 근대화 과정에서 나온 금속 양기
1909. 8. 29.~1910. 8. 29.
경북 예천군 대저리 박씨가의 일기를 보면, 1909년 양력 11월과 12월의 달력 사이에 '새로 도량형기를 제조하여 각 동에 배포하고 공가(工價·물품을 만드는 품삯)를 거두었는데, 큰 마을에는 공전 60냥 또는 70냥을 거두었다'고 적었다. 1911년 1월 25일자에는 '새로 도량형기를 제조하여 돈을 받고 면내의 부자에게 나누어준다는데, 만약 옛 도량형기를 사용하여 법령을 위반하면, 벌금 50냥이다'라고 적었다. 앞서 1909년 9월 도량형법을 개정한 일본은 자신들의 제도를 대한제국에 그대로 시행했다. 20세기 초 한국의 도량형 통일은 일본인들의 손으로 이루어졌다.중국에서는 기원전 3세기에 진시황이 도량형을 통일하였고, 그전의 춘추전국시대에도 그러한 노력은 있었다. 그런데 후대에 도량형제도가 문란해져 20세기 초에도 지역에 따라, 그리고 같은 지역에서도 업종이나 물품에 따라 차이가 나기도 했다.
한국에서도 중국과 마찬가지로 도량형의 통일을 국가의 기본 업무로 삼아 중국의 도량형제도를 도입하였고, 세종 때에 도량형제도가 완비되었다. 그런데 실생활에서 도량형의 문란상은 중국과 다를 바 없었다. 부피를 재는 양기(量器)가 특히 혼란스러웠는데, 지역마다 그 크기가 달라서 쌀을 사면서 자신이 휴대한 되로 부피를 다시 측정하곤 했다. 심지어 정부도 흉년에는 녹봉 등으로 배포하는 쌀의 양을 줄이기 위해 양기를 축소하기도 했다.그래서 황성신문 1899년 8월 22일자에 의하면, "이 도량형의 무법(無法)함이 우리 한국보다 심한 나라는 없다"고 개탄하고 "국가의 대정(大政)은 도량형을 같게 함이 첫 번째이다"고 천명하였다.
- ▲ 조선시대 양기
일본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뒤이은 도쿠가와 정부의 노력으로 도량형의 통일이 상당한 수준으로 이루어졌다. 1795년 프랑스에서 과학적인 미터법이 공포되면서 프랑스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도량형의 통일을 실현할 계기를 마련하였다. 미터법은 이전의 도량형과 달리 비(非)자연물을 단위로 하여 세계 어디에서나 그 표준을 동일하게 할 수 있었다. 일본은 1885년 미터법조약에 가맹하고, 1891년 도량형법을 제정하면서 척(尺)과 관(貫)이라는 전통적인 단위를 기본으로 하면서 미터법에 준하여 정의하였다. 이 제도가 1909년 조선에 적용된 것이다.
대한제국은 1902년 도량형을 담당하는 평식원(平式院)이라는 관청을 세우고 미터법을 도입하여 도량형의 근대화를 추진하였다. 일본 도량형법처럼 길이는 척, 부피는 석(石)·두(斗)무게는 근(斤)·냥(兩)이라는 재래의 단위를 사용하면서 1척=10/33m, 1냥=37.5g으로 미터법에 연계시켰다.
유럽이 성취한 근대문명을 동아시아에서는 일본이 가장 먼저 흡수하였고, 한국은 그것에 자극을 받아 근대화정책을 추진하였다. 한국정부가 추진하다 미완에 그친 개혁을 일본 식민지권력이 수행하기도 하였는데, 도량형 통일이 그 한 예이다. 도량형의 통일은 거래의 편의를 높이고 거래 비용을 절감하였으며 상인의 농간을 줄여 시장의 통합과 성장으로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