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100년전 우리는

[99] 조선은 온통 민둥산이라…

namsarang 2010. 4. 23. 20:31

 [제국의 황혼 '100년전 우리는']

 

 [99] 조선은 온통 민둥산이라…

  • 박기주 성신여대 교수·경제학

1909. 8. 29.~ 1910. 8. 29.

조선 말기에 한반도를 방문한 외국인들의 예리한 관찰력은 산이 온통 민둥산임을 놓치지 않고 기록한다. 땔감을 지게에 가득 진 조선인의 모습도 외국인 여행기에 심심찮게 등장한다.

1894년 초 비숍이 받은 서울의 첫인상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여기저기에 소나무 그늘이 있으나 거의 벌거벗었다'(조선과 그 이웃나라들)는 것이었다. 서울 주변만 그랬던 것은 아니다. 1889년 함경북도를 여행한 러시아인 베벨리는 '이곳의 숲은 완전히 파괴되었으며, 통행이 힘들고 벤 나무를 반출하기도 불가능한 산간벽지에만 겨우 숲이 남아있다'고 하였다. 대한제국 마지막까지 조선과 함께 했던 헐버트 박사도 '반도의 어느 곳을 가나 벌거숭이산을 볼 수 있는데 이러한 광경은 활엽수로 가득 찬 일본의 풍경과는 극히 대조적'(대한제국멸망사)이라고 썼다.

산림의 황폐화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1873년 봄에 영의정 이유원이 "도끼로 나무를 찍는 것이 날로 심하여 산에 씻은 듯이 나무가 없어졌으니 이것은 다 법령이 해이해졌기 때문"이라고 아뢰자, 고종도 "도성 안을 놓고 보더라도 사산(四山, 서울 도성의 성터로 연결된 백악산·인왕산·남산·낙산)에 소나무를 길러 울창하였기 때문에 그전에는 땅이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몇 그루인가를 셀 수 있을 만큼 적어졌다"고 개탄한다(고종실록).

1903년 서울 무악재 주막과 민둥산 풍경. 소 등에 땔감이 잔뜩 실려있다.

베벨리는 마루 아래 연기 통로와 밖에 아궁이가 있는 조선 가옥의 독특한 난방구조로 인한 무의식적이고 비생산적인 연료소비, 혹독한 추위의 겨울, 높은 인구밀도, 산림채벌에 대한 조정의 감시와 규제의 부재 등이 산림 황폐화를 가속화한다고 보았다. 헐버트는 '아침과 저녁으로 불을 피우기 시작하면 한두 시간 동안 온 마을이 짙은 연기에 휩싸인다'고 묘사한다.

목재나 연료를 얻기 위한 투작(偸斫·도벌)이 곳곳에서 벌어졌다. 이에 대한 조선왕조의 대책은 나무의 벌목을 금하는 금송(禁松)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금송과 엄벌만으로는 산림을 보호할 수 없었다. 산은 어느새 민둥산이 되고 서울에서는 호랑이의 울음소리도 점차 들을 수 없게 되었다. 1910년에 남한의 1정보당 임목축적은 10㎥ 정도로 2008년 현재와 비교해 10분의 1에도 못 미쳤다.

1907년에 이르러 비로소 농상공부 산림국은 모범 식림장 설치 계획을 세우고 해당 지역 주민이 채초(採草)·벌목·경전(耕田)·건축·방화하는 것을 금하라는 훈령을 해당 군에 보낸다. 이후 일본인 기사를 보내 1908년 봄에 서울 창의문 내 백운동(현 청운동) 5정보, 서문 밖 10정보, 노량진 50정보, 대구 100정보, 평양 100정보를 식림하였다(황성신문 1908.4.9.).

 

최초의 공식적인 대규모  조림사업은 이렇게 시작되었으며, 특히 백운동에는 최초의 사방공사가 실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