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이윤용(李允用·이완용의 형)
1909. 8. 29.~1910. 8. 29.
1910년 3월 12일자 황성신문은 '경쟁의 수손(受損)'이라는 제목 아래 다음의 기사를 실었다."서울에 있는 대한협동우선회사(大韓協同郵船會社)는 순전히 우리나라 사람으로 조직하여 약 20만원의 자본으로 현익(顯益), 창룡(蒼龍), 용성(龍城)의 세 기선을 구입하여 부산~원산간에 항해하면서 각지 객주와 계약하여 북쪽으로는 잡화를, 남쪽으로는 명태를 운반하여 매년 1만원 이상의 순이익을 얻더니 작년에 일본 기선이 항행한 이래로 극렬한 경쟁을 이기지 못하여 고객과 화물을 거개 일본선에 빼앗겨서 약 1만원의 손실을 입게 되었다."
대한매일신보도 같은 날짜에 "작년 이래로 일인이 윤선 11척으로 북한 연해에 선업을 시작한 후부터는 대한협동우선회사에 큰 방해가 된다더라"고 보도하였다. 두 신문이 우선회사의 동향에 깊은 관심을 가진 것은 이 회사가 개항기 최대의 조선인 해운업체였기 때문이다. 우선회사는 일본인으로부터 항해권을 회복할 목적으로 1900년 설립되었다. 관료가 임원진의 주축을 이루어 사장은 고위관료인 이윤용(李允用·이완용의 형)이었고, 총무는 부산 객주 정치국(丁致國)이었다. 정치국은 1899년 회사를 설립해 임차한 일본인 기선으로 동해안 각지를 운항한 바 있었다.
- ▲ 당시 부산항 모습
설립 당초 3만원이던 회사의 자본금은 1년 후 20만원으로 급증하였다. 이 회사는 관영 이운사(利運社)의 기선 3척(각 536t, 709t, 1027t)을 불하받고 2척(97t, 147t)을 구입하였으며, 일본에 유학한 항해사를 고용하여 국내 각지뿐 아니라 일본 오사카, 중국 상해 등지를 왕래하였다. 우선회사는 1900년 9월 14일자 황성신문에 '인천에서 출발하는 창룡호가 연대(烟台)-상해(上海)를, 현익호가 군산-목포-제주-부산-함경도를 항행한다'는 광고를 냈는데, 이런 광고가 1906년 3월 29일까지 매일 계속됐다.
앞서 조선 정부는 1885년 전운국(轉運局)을, 1893년 이운사를 설립하여 조세와 관용물자를 운송하였고 상인 화물과 여객의 운송을 맡겼다. 기선으로 부강을 도모하려는 고종의 뜻이었다. 그러나 이운사는 일본 업자와의 경쟁에 밀려 해체되었다. 또 1882년 정부가 조선인의 외국 기선 구입을 허용하자 1886년부터 민간 기선업체가 출현하였으나, 일본 업체의 압박, 운송량 부족과 자금난, 침몰 사고 등으로 단명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런 가운데 출범한 것이 '우선회사'였다. 조선정부는 1901년 군산항에 우선회사의 지점과 창고를 건설하도록 허용하였으나 일본은 민간 기업에 그런 혜택을 줄 수 없다며 막았다. 정부는 국내 업체를 보호·지원하고 싶었으나 자금이 부족하고 힘도 약했다. 그런데도 우선회사는 1902년부터 벌어진 일본 업자와의 치열한 경쟁을 잘 견디어냈다. 1909년 우선회사는 경영난을 타개하기 위해 서해안 정기항로 개설 계획을 세우고 보조금을 청원했지만, 일제의 통제를 받는 정부는 거부했다. 결국 그해 우선회사는 결정적인 타격을 입고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조선정부가 일본처럼 효과적으로 회사를 지원할 수 있었다면 한국 해운사는 달라졌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