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100년전 우리는

[100] 일본 공사를 호통친 소금장수 김두원

namsarang 2010. 4. 25. 16:14

[제국의 황혼 '100년전 우리는']

 

[100] 일본 공사를 호통친 소금장수 김두원

 

  • 전봉관 KAIST 교수·한국문학
일본공사 하야시(林權助)

 

1909. 8. 29.~1910. 8. 29.

'함경남도 원산항에 거하는 소금장수 김두원씨가 소금값 5만1919원을 추심할 차로 작년 겨울에 가쓰라(桂太郞) 일본 총리와 소네(曾�Y) 통감과 중의원 의장에 장서(長書)를 제정하였다는데 지금까지 어떠한 조치도 없으므로 본월 7일에 또 장서와 증거 되는 신문을 동봉하여 가쓰라 총리와 소네 통감과 중의원 의장으로 보내고 소금값을 속히 보내라고 독촉하였다더라.'(대한매일신보, 1910.3.15.)

김두원은 일본 정부에 소금값을 물어내라고 집요하게 탄원해 한국은 물론 일본에까지 이름을 떨쳤다. 동해안 일대를 오가며 소금을 도매하던 그는 1899년 시마네현(島根縣)에 사는 기무라(木村源一郞) 형제에게 소금 1088섬을 절취당했다. 기무라 형제는 울릉도에 소금값이 폭등했다고 김두원을 꾀어 그의 소금을 배에 싣고 울릉도에 가서 그가 먼저 하선한 틈을 타 소금을 실은 채 사라졌다. 그 후 김두원은 한국 정부와 일본공사관에 탄원서를 제출했다. 외부대신 박제순은 일본공사 하야시(林權助)에게 진상조사를 요청했다.

1920년대 울릉도 모습

하야시는 한국 정부에 "기무라 형제는 사법 처리돼 징역을 살고 있고, 그들이 은닉한 재산은 발견할 수 없다. 상속인은 실업자인 데다 너무 가난해 소금값을 물어낼 형편이 못 된다"며 유감을 표하고, 김두원에게는 '구휼금' 명목으로 몇 백원을 지급하겠다고 통보했다. 그러나 김두원은 소금값을 모두 받아야겠다며 구휼금 수취를 거부했다.

일본인에게 소금을 절취당했다고 해서 일본 정부에 소금값을 물어내라고 요구하는 것은 법적으로는 근거가 미흡할지 몰라도, 김두원은 나름대로 명분이 있었다. 그 빌미는 다름 아닌 일본이 제공했다. 김두원은 탄원서에 구체적인 사례를 적시했다.

"일본 범선이 우리나라 홍주군 장고도 바윗돌에 부딪혀 파선된 것을 그 바윗돌이 우리나라 것이라 하여 배상금 3000환을 우리 정부에서 받아가고, 또 공주군에서 유련(留連·객지에 머묾)하던 일본인이 우리나라 군인과 시비를 하다가 구타를 당하였다고 치료비 5000환을 우리나라 정부에서 받아갔으니 이 전례와 같이 본인의 소금값도 일본 정부에서 물어내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신보', 1910.3.20.)

1903년 김두원은 일본 공사관 정문 앞에서 인력거를 타고 가는 하야시를 만나 "네가 무슨 일본을 대표하는 공사냐? 너희 나라는 백성의 도둑질을 그렇게 다스리느냐? 그러고도 동양의 일등국가라고 자랑하느냐?"며 인력거를 쓰러뜨려 하야시에게 가벼운 부상을 입혔다. 을사늑약 직후 박제순을 만나서는 "지금 서울에 호랑이가 없거늘 무엇이 무서워 총칼을 찬 일본인 헌병과 순사를 앞뒤에 호위하고 다니느냐. 나라의 대신으로 백성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할 생각이 없고, 단지 기생과 풍악으로 허송하면서 공연히 월급만 축내느냐?"며 꾸짖었다.

1920년 이후까지 김두원은 집요하게 일본 정부에 소금값을 물어내라고 탄원했고, 그 때문에 구금 유배되기를 거듭했다. 그가 소금값을 받았다는 기록은 없다. 하지만 그는 일본인과 친일파들에게 한국인의 기개와 끈기를 보여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