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100년전 우리는

[101] 만주 의병장의 비통한 일기(日記)

namsarang 2010. 4. 26. 20:50

  [제국의 황혼 '100년전 우리는']

[101] 만주 의병장의 비통한 일기(日記)

김기승 순천향대 교수·한국사

 

1909. 8. 29.~1910. 8. 29.

"사람들은 모두 명절을 즐기는데/ 나만 홀로 좋은 이 날 슬퍼하네/ 반 천리 먼 곳으로 집을 떠나와/ 또 한 해 봄이 노는 것 보누나/ 우국의 눈물에 고향 생각 더 해/ 두세 잔 술을 흠뻑 들이키누나/…새해 맞는 지금 이후로/ 마음을 단결하여 사귐을 맺어보세/ 마음을 단결하여 나라를 위해/ 함께 꽃핀 봄 들판 올라보세."('용연 김정규 일기', 1910년 설날, 날짜는 음력임).

함북 경성 출신의 유생 김정규(金鼎奎·1881~1953·호는 龍淵)는 1908년 고향에서 의병을 일으켰다가 1909년 두만강을 넘어 간도로 갔다.

유생 김정규(가운데가 김정규. 뒤는 제자들)
그곳에서 의병의 재기를 도모하였다. 위의 글은 경술년 설날 그가 '일기'(1907.2.16.~1921.10.6.)에 남긴 소회이다. 우국의 슬픔 속에서도 그는 나라를 되찾겠다는 결의를 다진다.

"의병을 일으킨 사람 조맹선씨가 찾아와 말하기를 지금 청나라 관리가 러시아 왕과 교섭하여 크게 군사 장비를 갖추고 장차 왜적을 공격하려고 하는데, 자신을 참모원에 임명하여 동포를 모집하라고 했다고 한다."('일기'·1910.1.13.)

고대하던 소식이었다. 김정규는 자신이 직접 오록정(吳祿貞) 독판(督辦)을 찾아가 중국측의 지원을 얻어내고자 했으나 부관을 통해 간접적으로 자신의 뜻을 전달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의 요구사항은 '변방의 병영에 우리 의병의 출입을 금하지 말 것, 옛 화포 중 낡은 것을 싼값에 우리 측에 양도할 것, 간도에 있는 우리나라 화포 수집을 금지하지 말 것' 등 세 가지였다.('일기'·1910.1.22.). 한마디로 중국에서 한국인 의병부대의 자유 활동과 무장을 보장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중국 독판은 국제법 운운하며 '화를 부를까 두려워하여 끝내 지급을 허락할 수 없다'고 했다. 이에 김정규는 중국인 부관에게 항의했다.

김정규 일기

"대답을 하지도 않고 지급하지도 않는다니, 이건 무슨 도리란 말인가. 우리나라의 군수물자를 가져가겠다는 것이지 귀국의 군수물자를 가져가겠다는 것이 아니다. 귀하께서 이토록 우리를 꺼린다면 어찌 나를 포박하여 가두어 일본 사람에게 넘기지 않는가?"

일본의 영향력은 간도까지 미쳐 중국측도 의병투쟁 지원에 미온적이었다. 게다가 '10여리에 떨어져 있는 땅개 놈, 즉 매국적 일진회원이 와서 자신을 탐문 조사'하는 등 친일파들에게 감시당하는 처지였다.

"아, 이 날은 바로 지난날 내가 서쪽으로 넘어오던 날이고, 이 해는 바로 내가 서른이 되는 해이다. 세월은 물처럼 흘러가 버렸는데, 사업은 이루지 못했으니 장차 어찌해야 하는가…비통한 노래를 날이 저물도록 부르다가 붓을 들고 길게 탄식하였다."('일기'·5.25.)

8일 뒤 김정규에게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13도 의군이 조직되었으니 장의군 종사로 참여하라는 반가운 서신이 도착한다. 도총재 유인석과 창의총재 이범윤에게 10여일 뒤 투쟁 결의를 다진 서신을 보낸다. 13도 의군은 국망 이후 러시아 당국의 지도부 검거로 해체되었으나, 김정규는 1920년 간도에서 대한의군부를 조직하는 등 독립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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