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100년전 우리는

[103] 장인환·전명운, 스티븐스를 쏘다

namsarang 2010. 4. 28. 22:29

[제국의 황혼 '100년전 우리는']

 

 [103] 장인환·전명운, 스티븐스를 쏘다

  • 권영민 서울대 교수·한국문학

 

1909. 8. 29.~1910. 8. 29.

1908년 3월 23일 미국 샌프란시스코 부두에 승용차 한 대가 도착했다. 이 승용차에는 일본 영사 고이케와 한국 정부의 외부 고문 미국인 스티븐스(D.W.Stevens)가 타고 있었다. 스티븐스는 오클랜드를 거쳐 워싱턴으로 떠날 계획이었다. 그런데 스티븐스가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자 키가 작은 한국인 한명이 재빨리 스티븐스에게 다가섰고 손수건으로 감싼 리볼버 연발 권총을 발사했다. 그러나 권총은 불발이 되고 말았다. 그는 권총을 든 손으로 스티븐스의 얼굴을 가격했다. 스티븐스가 그를 피하면서 몸싸움이 벌어지는 순간 다시 세 발의 총성이 울렸다. 또 다른 한국인이 뒤에서 스티븐스를 겨냥한 것이었다. 첫째 총알은 앞선 한국인의 어깨를 맞혔고, 나머지 두 발은 스티븐스에게 명중했다. 한국인 두 사람은 현장에서 체포되었으며, 스티븐스는 이틀 만에 병원에서 죽었다.

사건을 보도한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지, 1908년 3월 24일자. 중앙 인물이 스티븐스, 왼쪽이 전명운, 오른쪽이 장인환 의사의 당시 모습
동경 주재 미국공사로 일했던 스티븐스는 미국 관리직을 사임한 후 일본 외무성에 고용되었다가 일본 정부의 천거로 1904년 대한제국의 외부 고문으로 서울에 들어왔다. 그는 일본의 한국 침략이 본격화되는 동안 을사조약의 막후 역할을 맡는 등 일본의 공작원처럼 행동했다. 1908년 그는 미국으로 귀환하면서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여 언론회견을 통해 "한국은 미국이 필리핀에서 한 것처럼 일본의 통치에 의해 제대로 발전한다" "이완용 같은 충신과 이토 히로부미 같은 통감이 한국에 있는 것은 큰 행복이다"라고 망언을 서슴지 않았다.


장인환(張仁煥·1876~1930)(왼쪽) 전명운(田明雲·1884~1947)(오른쪽)

미주 한인들은 스티븐스의 친일적 망동을 지켜보면서 모두가 분개했다. 장인환(張仁煥·1876~1930) 전명운(田明雲·1884~1947)은 일본 앞잡이인 스티븐스를 응징하기로 결심했다. 일찍이 하와이 노동이민으로 미국에 건너간 두 사람은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한 뒤 막노동자로 일하면서 미주에서 결성된 항일단체인 대동보국회와 공립협회에 가입해 활동하고 있었다.

장인환·전명운 두 의사의 거사 소식은 즉각 국내에 전해졌다. 대한매일신보는 '쾌한 자의 쾌한 일'이란 제목으로 '한국 외부 고문관 미국인 슈지분(須知芬)이 미국 상항(桑港·샌프란시스코)에서 총을 맞아서 비상히 중상하였는데, 총 놓은 자는 상항에 머무는 한국 사람이라'(1908. 3. 25.)고 첫 소식을 전했고, 이어 3월 28일자에서 스티븐스의 사망 소식과 함께 두 의사의 행적을 상세히 보도했다. 그 뒤 두 분의 사적을 기록한 책자를 미국 거주 한인들이 제작하여 배포하게 되었다는 소식('신보', 1909. 5. 19.)도 나왔고, 두 의사의 재판 과정에 대한 소식이 잇달아 보도되었다(황성신문, 1909. 1. 8.). 미국 법원은 전명운에게 무죄를, 장인환에게 25년형을 선고했다. 장인환은 1919년 가석방됐다. 두 의사의 거사는 일 년 뒤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응징, 이재명 의사의 이완용 저격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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