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9. 8. 29.~1910. 8. 29.
1908년 3월 23일 미국 샌프란시스코 부두에 승용차 한 대가 도착했다. 이 승용차에는 일본 영사 고이케와 한국 정부의 외부 고문 미국인 스티븐스(D.W.Stevens)가 타고 있었다. 스티븐스는 오클랜드를 거쳐 워싱턴으로 떠날 계획이었다. 그런데 스티븐스가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자 키가 작은 한국인 한명이 재빨리 스티븐스에게 다가섰고 손수건으로 감싼 리볼버 연발 권총을 발사했다. 그러나 권총은 불발이 되고 말았다. 그는 권총을 든 손으로 스티븐스의 얼굴을 가격했다. 스티븐스가 그를 피하면서 몸싸움이 벌어지는 순간 다시 세 발의 총성이 울렸다. 또 다른 한국인이 뒤에서 스티븐스를 겨냥한 것이었다. 첫째 총알은 앞선 한국인의 어깨를 맞혔고, 나머지 두 발은 스티븐스에게 명중했다. 한국인 두 사람은 현장에서 체포되었으며, 스티븐스는 이틀 만에 병원에서 죽었다.- ▲ 사건을 보도한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지, 1908년 3월 24일자. 중앙 인물이 스티븐스, 왼쪽이 전명운, 오른쪽이 장인환 의사의 당시 모습
- ▲ 장인환(張仁煥·1876~1930)(왼쪽) 전명운(田明雲·1884~1947)(오른쪽)
미주 한인들은 스티븐스의 친일적 망동을 지켜보면서 모두가 분개했다. 장인환(張仁煥·1876~1930) 전명운(田明雲·1884~1947)은 일본 앞잡이인 스티븐스를 응징하기로 결심했다. 일찍이 하와이 노동이민으로 미국에 건너간 두 사람은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한 뒤 막노동자로 일하면서 미주에서 결성된 항일단체인 대동보국회와 공립협회에 가입해 활동하고 있었다.
장인환·전명운 두 의사의 거사 소식은 즉각 국내에 전해졌다. 대한매일신보는 '쾌한 자의 쾌한 일'이란 제목으로 '한국 외부 고문관 미국인 슈지분(須知芬)이 미국 상항(桑港·샌프란시스코)에서 총을 맞아서 비상히 중상하였는데, 총 놓은 자는 상항에 머무는 한국 사람이라'(1908. 3. 25.)고 첫 소식을 전했고, 이어 3월 28일자에서 스티븐스의 사망 소식과 함께 두 의사의 행적을 상세히 보도했다. 그 뒤 두 분의 사적을 기록한 책자를 미국 거주 한인들이 제작하여 배포하게 되었다는 소식('신보', 1909. 5. 19.)도 나왔고, 두 의사의 재판 과정에 대한 소식이 잇달아 보도되었다(황성신문, 1909. 1. 8.). 미국 법원은 전명운에게 무죄를, 장인환에게 25년형을 선고했다. 장인환은 1919년 가석방됐다. 두 의사의 거사는 일 년 뒤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응징, 이재명 의사의 이완용 저격으로 이어졌다.
'한민족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는 젊은 테러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