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큰 호랑이 두 마리가 민가로 뛰어들어
- 남자를 물고 어린아이를 채 가는 그림
1909. 8. 29.~1910. 8. 29.
미국 제26대 대통령을 지낸 루스벨트(재임 1901~1909년)가 퇴임 후 동양을 방문하여 한국 북방에서 호랑이 사냥을 할 계획이라는 외신이 1910년 7월 10일 대한매일신보와 황성신문에 실렸다. 그 후 그가 실제로 한국을 방문했다는 소식은 없지만, 그만큼 한국 호랑이는 세계적으로 유명했다.
호랑이는 두려움의 대상이면서도 사랑받는 동물이었다. 최남선은 조선의 상징을 호랑이로 보았고 국민의 기상이 호랑이처럼 용맹하고 진취적이기를 바랐다. 당시는 전국 각지에 호랑이가 출몰하여 사람과 가축에게 피해를 입히는 일이 자주 일어나던 시절이다. 신문에는 호랑이로 인한 사고 기사가 자주 실렸다.
1908년 11월에는 종로구 궁정동 '육상궁'에서 밤이면 큰 호랑이가 으르렁거리는 바람에 궁 안에 사는 사람들이 무서움에 떨었다(신보, 1908.11.6.). 같은 해 6월 경북 의흥군(현 군위) 산속에 나타난 호랑이는 나무꾼을 뜯어먹어 수족만 남겨두었고, 전남 지방에서는 8월에 여자를 물고 가는 호랑이를 보고 동네 사람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자 그대로 두고 달아났지만 중상이었다.
같은 해 11월 강원도 삼척 산골에 호랑이 두 마리가 나타나 사람을 산중으로 물고 가서 잡아먹었고 그 후에도 사람과 소가 많이 다쳤다. 12월에는 충청도 홍주군(현 홍성)에서 호랑이에게 물려 죽은 사람이 세 명이나 되었고, 1909년 3월 용산에서 큰 소만한 호랑이가 갑자기 나타나 지나가던 사람 8명 가운데 한 사람의 엉덩이를 물고 도망갔는데 일인 헌병이 잡아죽이기도 하였다. 1910년 8월 함경북도 부령군에 나타난 맹호는 돼지 두 마리를 물고 가서 지역 사람들이 해진 뒤에는 문을 닫고 나가지 않는다는 소식도 있었다. 큰 호랑이 두 마리가 민가로 뛰어들어 남자를 물고 어린아이를 채 가는 그림이 프랑스의 '르 프티 주르날'(1909년 12월 12일자)에 실릴 정도였다(신용석, '격동의 구한말, 역사의 현장', 1987.5.).
호랑이의 잦은 출몰은 의병의 무장 봉기를 차단하기 위해 일본이 한국인의 총포 소지를 금지한 조치와 연관이 있었다. 포수가 사라지자 각 지방에서 호랑이·표범·곰 같은 맹수가 나타나 많은 피해를 입히게 되었던 것이다. 들판에서는 거의 매일같이 늑대와 호랑이가 출현했기 때문에 마음놓고 여행을 떠나기도 힘들 지경이었다. 어떤 마을에서는 며칠 동안 호랑이가 끊이지 않고 출몰하여 33명이 공격을 받았다는 말도 있었다(신용석, 위의 화보).
대한제국 정부는 총기를 규제할 수 있는 규칙을 제정하여 일반인의 총기사용을 허가하는 방안도 검토했지만 곧 나라가 망하여 정부가 손쓸 새도 없었다(황성신문, 1909.7.29.). 일제 강점기 호랑이해였던 1926년(병인년)까지 호랑이가 자주 나타났다. '대호(大虎)가 떼를 지어 촌중(村中)으로 횡행/ 강원도 평창군 옥수재에서 호랑이가 닷새 동안 들끓어'(조선일보, 1926.1.11.), '병인년 수(首)에 호랑이에게 물려/ 느티령 밑에 선지피만…(〃.1.12.)' 같은 기사가 연달아 나왔다.
1920년대 말 무차별 포획이 벌어진다. '포수들이 신장 6척의 맹호를 총살(1928.12.10.)', '화천에 출몰하는 맹호 토벌(討伐)코자 포수가 활동'(1929.6.30.) 등의 기사가 보인다. 일제 때 새끼를 거느린 어미 호랑이까지 무차별로 사살하여 안타깝게도 이 땅의 영물(靈物)인 호랑이는 한반도에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