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9. 8. 29.~1910. 8. 29.
"무릇 천도(天道)에 춘하추동이 있으니 이를 변역(變易)이라 한다. 인사(人事)에 동서남북이 있으니 이것 역시 변역이라 한다. 천도·인사가 때에 따라 변역하지 않으면 실리를 잃고 끝내 성취하는 바가 없게 될 것이다."('一堂記事'·조카이자 비서였던 김명수가 펴낸 이완용 전기)1909년 세모에 국내외 신문을 뜨겁게 달군 것은 총리대신 이완용 피습사건이다. 매국 친일파의 대표적 인물인 이완용은 '변신의 귀재'였다. 그는 1858년 경기도 광주 태생이며 호는 일당(一堂)이다. 어린 시절부터 신동 소리를 들었으며 판중추부사 이호준에게 입양되어 학문이 일취월장한다. 25세에 문과에 급제하고 규장각 대교(待敎)로 있으면서 최초의 관립학교인 육영공원의 학생으로 선발되어 헐버트 등 미국인 초빙교사로부터 서양식 교육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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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왼쪽이 이완용. 피습 20여일 뒤인 1910년 1월 초의 쇠약한 모습이다. 맨 오른쪽이 -
농상공부대신 송병준
그는 "강대국으로 부상한 미국을 의식하여 육영공원에 진학했다"고 회고한다. 이를 계기로 이완용은 친미(親美)적 관료로서 주미공사단의 참찬관, 임시대리공사를 거친다. 하지만 명성황후 시해 사건 후에는 아관파천을 주선하여 친일파를 몰아내고 친러내각에서 요직을 맡는다. 한때 독립협회 창립멤버로서 독립문 건립에 앞장서지만, 구미 열강에 많은 이권을 양여한 이유로 독립협회에서 제명되고 내각에서도 밀려나 지방으로 좌천되기도 한다.
1901년 궁내부 특진관에서 은퇴했다가 4년 후 복귀한 이완용은 친일(親日)파로 변신한다. 1905년 학부대신이 되자 을사조약 체결을 적극 옹호하였고, 1907년 6월 이등박문의 추천으로 내각 총리대신 겸 궁내부대신이 된 뒤에는 송병준등과 함께 고종에게 양위를 강요하고 군대를 해산한다. 마침내 대한제국의 총리대신으로 합방조약 체결을 주도하여 그 공로로 일본에서 백작 작위를 받았으며, 합방 후 총독부 중추원 부의장이 되어 '일선융화'를 주장하고 3·1운동 진압에 기여한 공로로 후작 작위를 받는다.
이런 변신에 대해 이완용은 "때를 따라 마땅한 것을 따른 것일 뿐 다른 길이 없다"고 변명하였다. 그러나 독립협회 시절 동지였던 윤치호는 "그의 특권의식, 야비한 교활성과 음흉함, 그와 같거나 열등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고집스럽고, 권세 있는 사람들에게는 굴욕적일 만큼 복종하는 태도, 이 모든 것이 나로 하여금 그에게 편견을 갖게 한다. 이완용은 철저한 기회주의자요 변절주의자 아부주의자였다고 할 수 있다"(윤치호 일기)고 비판한다.
이완용의 합방논리는 '자연의 운명과 세계적 대세에 순응하여 동양평화를 확보하는 것이 조선민족의 유일한 활로'이며 '그래야 동양이 서양에 맞설 수 있다'는 동양평화론이다. 이등박문의 극동평화론과 다르지 않다. 이 동양평화론은 일본의 조선합방과 대륙팽창을 합리화한다. 그러나 일본의 세력 확장은 결코 동양 평화를 가져오지 않았다. 권력과 금전을 향한 이완용의 탐욕과 변신은 결국 1700만 동포를 망국의 큰 슬픔에 빠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