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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무렵 열강의 철도 이권 획득 경쟁이 치열해져, 정부는 1896년과 1898년 ‘철도 이권을 제공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천명하였다. 1898년 서울~목포 간 철도 부설 계획이 고종의 재가를 받았으나 자금난으로 실현되지 못하였다. 1902년에는 서울~개성 간 철도 공사에 착수하였으나, 이 역시 자금난으로 중단되고 말았다. 민간인의 철도부설운동으로 1897년부터 박기종 등이 부산~하단포 간, 서울~원산~경흥 간, 이어서 삼랑진~마산 간 철도 부설을 추진하였으나, 자금 조달부터 여의치 않았다. 자금 궁핍은 개항기 조선인의 모든 철도부설운동의 난관으로 작용했다.
- ▲ 창립위원 민병석
1904~1908년간에 개항기 한국인에 의한 최후의 철도부설운동이 전개되었다. 대한운수회사를 설립(1898년)하여 철도화물 운수업을 하던 서오순(徐午淳)은 호남철도의 부설을 발의하였다. 1904년에는 독립협회 회원인 이윤용(李允用)을 사장, 서오순을 전무로 하는 호남철도주식회사가 설립되었다. 창립위원은 민병석등 9명인데, 6명이 관료였다.
이들은 철도가 국가의 부강(富强)과 독립에 긴요한데도 이미 부설된 경인·경부·경원철도가 외국인의 수중에 있는 문제점을 인식했다. 게다가 물산이 풍부한 호남을 관통하는 철도는 이익이 클 것으로 예상되었다. 호남철도 부설에는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도 취지에 동감하여 적극 후원하였다.
서오순은 1904년 직산~목포 간 철도부설 허가를 얻고 조치원~강경 간을 측량하였다. 1906년에는 강경~전주 간 2차 측량사업이, 1907년 11월부터 다음해 8월까지는 토목공사가 추진되었다. 그러나 부설사업이 더딘 것은 일본이 부설권의 취소를 수차례 강경하게 요구한 데다 주식자금의 모집이 부진하였기 때문이다. 일본의 취소 요구는 사업의 전도를 불안하게 했다.
- ▲ 호남철도(개통 당시의 목포역)
자금난에 직면한 서오순 등은 1906년 말 “국가 부강책으로 철도보다 큰 것이 없고” “독립의 기초로서 철도를 우선으로 한다”고 피력하면서 정부의 지원을 요청하였다. 이어 서오순은 “대한독립의 원인은 이 호남철도에 있다”라고 시작하는 혈서를 써 사원들이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이에 고종이 1만원을 하사하고 한국인 실업인들이 주식 모집에 참여하였다. 1908년 2월부터 주식모집운동이 전개되었는데, 그것을 후원한 황성신문(2월 29일자 논설)에 의하면, 사업 소요자금 400만원에 해당하는 주식 8만주 중 2만주는 모집되었다고 했다. 이 모집운동은 정부의 후원으로 성과를 거두는 도중, 친일관료 송병준이 전라도 관찰사에게 ‘주식모집운동을 지원하지 말라’는 훈령을 보내는 등 방해하여 결실을 이루지 못했다. 대한매일신보는 “철도·광산·어업 등 제반 이권을 상실하고서 조선민족이 생존코자 한들 어찌 가능한가” 하며 한탄하였다. 결국 호남철도는 1914년 일본인에 의해 개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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