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100년전 우리는

[87] 통감부가 두려워한 한국어 신문

namsarang 2010. 4. 11. 15:46

 [제국의 황혼 '100년전 우리는']

 

[87] 통감부가 두려워한 한국어 신문

  • 정진석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언론정보학

1909. 8. 29.~1910. 8. 29.

1909년 한 해 동안 통감부는 137회에 걸쳐 국내와 해외에서 발행된 한국어 신문 2만947부를 압수했다. 대한매일신보 국한문판과 한글판을 포함하여 미국과 러시아에서 발행된 한국어 신문이 주 압수대상이었다('조선총독부 施政年表' 1909년). 이 표에는 들어 있지 않으나 잡지 서적 연설문은 물론이고 침략의 앞잡이 역할을 맡았던 일본인 발행 신문까지 압수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다. 그러나 대한매일신보(이하 '신보')의 필봉은 꺾이지 않았다.

"국민의 행동을 구속하야 손 한번 들기와 발 한번 디디기도 자유로이 하지 못하게 하면 가히 그 나라를 멸망케 할까, 교육권을 차지하여 정신을 혼미케 하는 술법으로 청년의 뇌수를 변역(變易·고치어 바뀜)하면 가히 그 나라를 멸망케 할까, 언론을 속박하야 신문잡지의 출판함을 검열하며 혹 타국에서 자유로 발간하는 신문도 보지 못하게 하며 전하지 못하게 하면 그 나라를 가히 멸망케 할까."

'신보'는 이등박문을 오스트리아의 메테르니히(1773~1859·빈 회의를 주도하고, 유럽 여러 나라의 자유주의·민족주의 운동을 탄압했던 정치가)에 비유하여 '일백 명의 메테르니히가 능히 이태리를 압제하지 못한다'(신보, 국한문 1908.4.29., 한글판, 5.2.)는 논설로 침략정책을 통렬히 비판했다.

             ▲ 공립신보 1908년 3월 25일자.
"인민들이 천만길 지옥을 뛰어나와 청천백일을 좀 보고자할 사상이 있을까 염려하야 신문기자가 조금 분격한 언론을 게재하면 순검의 포승과 옥중에 형벌로 그 몸을 썩이며, 캄캄한 그믐밤 같은 토굴 속에서 허다히 무고한 백성을 몰아넣고 천만가지 기기괴괴한 수단으로 아무쪼록 그 눈을 멀게 하고 그 귀를 막게 하며 그 수족을 불인(不仁·몸의 어느 부분이 마비되어 움직이기가 거북한 증세)하게 하며 그 호흡을 통치 못하게 하여 일호반점이라도 생맥이 있는 듯하면 바삐바삐 틀어막으려고 했다."

오스트리아의 압제하에 있던 이태리를 한국의 현실로 묘사한 이 글은 통감부가 신보사 사장 영국인 배설(裵說)을 기소할 때 '치안방해'의 증거물로 제시했던 대표적인 항일논설이다. "오호라, 그 나라의 혼(國魂)만 잃지 않으면 비록 천변만화의 괴기 수단으로 압제를 행할지라도 소용이 없으리니…." 논설은 일제의 압제로부터 한국이 독립을 쟁취할 것임을 예고했다.

일본은 한국의 신문 잡지 단행본 등 출판물에 사전검열을 강행하여 기사의 삭제를 명령하는 일이 빈번했다. 이를 통해 국내 신문의 항일 기사는 사전에 차단할 수 있었지만, 공립신보(1908년 3월 25일자. 친일파 미국인 스티븐스를 저격한 장인환 전명운 의사의 사진과 기사가 실려있다), 대동공보 등 미국과 러시아에서 발행되는 교포 신문은 원천봉쇄가 불가능했다. 일제의 침략을 강경한 어조로 거침없이 규탄하는 국외 교포신문의 국내 유입에 대해 일본은 압수로 대응했다.

1908년 4월 29일 일본이 '광무신문지법'을 개정하여 '외국에서 발행된 한국어 신문과 한국에서 외국인이 발행하는 한국어 신문'도 발매·반포를 금지하고 압수할 수 있도록 한 것이 그것이다. 총칼을 든 일본도 신문의 힘이 두려웠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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