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9. 8. 29.~1910. 8. 29.
"인생은 잠깐이요 세월은 여류(如流)로다. 융희 3년은 겨우 하루가 남았으니 이때 이 사람의 감정이 실로 무궁하리로다. 머리를 돌려 지난 1년 동안을 생각해 볼진대 1년 12달 365일에 어느 달이 액달이 아니며 어느 날이 액날이 아니런가."
1909년 12월 30일 대한매일신보는 '묵은 액을 배송함'이라는 제목의 송년 논설을 싣는다. 출판법 공포(2월 23일)로 사상과 출판의 자유가 제한되고, 군부 폐지(7월 31일)로 병권을 잃고, 법부 폐지(11월 1일)로 사법권을 상실하고, 한국과 일본의 불량배들이 합방을 들먹이고, 재정 피폐로 인민이 모두 굶어죽고 얼어죽게 된 융희 3년은 말 그대로 '액'으로 점철된 한 해였다. 논설은 "동포들이 금년으로써 명년을 경계할진대 가히 명년으로 하여금 대길년(大吉年)"을 만들 것이라 희망했지만, 이듬해 세모에는 대한제국 자체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 ▲ 소네 아라스케 통감(왼쪽 사진)·관리들에게는 상여금(오른쪽 사진)
을씨년스러웠던 대한제국의 마지막 세모(歲暮)에도 망년회는 줄을 이었다. '소네 아라스케(曾彌荒助) 통감은 작일 오후 7시에 망년회를 설(設)하고 각부 대신과 내외국 고등관을 청하여 대접하였다더라'('신보', 12.30.). '보성전문학교에서는 지난 토요일 동기(冬期) 휴학식을 거행하고 강사 제씨는 그날 하오 8시에 혜천관에서 망년회를 행하였다더라'('신보', 12.28.).
관리들에게는 상여금(상여금 지급서)도 두둑이 지급되었다. '각부 차관의 연말 상여금을 각부 경비로 천환씩 지급하였다더라'('신보' 12.28.). '삼작일 하오 3시에 한성위생회에서 시무하던 순사에게 상여금을 35환에서 10환까지 지급하였다더라'('신보' 12.30.).
세모의 들뜬 분위기 속에서 사건과 사고도 줄을 이었다. 일본인 도굴꾼 5명이 경기도 장단군(1963년 이전까지 경기도 북서부에 있었던 행정구역. 지금의 파주와 연천)에서 고려총(高麗塚)을 파고 자기를 도굴하다가 검거되었고, 조형구와 황범수가 충청북도 영동군에서 은전(銀錢)을 위조하다 체포되었다. 평안북도 영변군에서 시장세(市場稅) 징수에 반발해 철시(撤市) 투쟁을 벌이던 상인 수백 명은 체포된 동료 3명을 구출하기 위해 경찰서를 습격했다.
세모와 상관없이 일본의 국권 침탈과 그에 대항한 의병 항쟁은 지속되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간행돼 국내에 유입된 신한민보가 치안 유지를 명분으로 압수되었고, 서울 주재 일본 신문기자단은 합방 선언서와 결의문 수천 부를 인쇄해 일본 내각을 비롯한 각처로 발송했다. 의병장 이진용은 황해도 평산군에서 일본 헌병과 교전했고, 전라북도 덕유산 일대에서 활약하던 이사임을 비롯한 의병 11명은 일본 헌병에 붙잡혔다.
"금까마귀 가는 곳에 옥토끼도 급히 뛰어/ 융희 3년 다 지나고, 융희 4년 돌아온다/ 비나니, 송구영신 제일곡의 국권 회복"(시조 '제일곡' '신보' 12.30.).
1910년을 맞는 이천만 동포의 새해 소원은 국권회복이었지만, 이듬해부터는 그 말마저 공공연히 입에 담을 수 없게 되었다.
▲지난 12월 31일자 A29면 ['제국의 황혼'] [88] '1909년 세모 풍경'에서 '소네 아라스케(曾彌荒助)'의 한자이름 중 '미(彌)'는 '예(襧)'의 잘못이란 독자 지적에 대해, 필자인 전봉관 KAIST 교수는 다음과 같이 답변해왔습니다. "조선왕조실록과 통감부 문서, 일본 국회도서관 사이트 등에서 '襧(아비사당 예)'로 쓰고 있는 것으로 보아 독자 지적이 맞습니다. 다만 글 속에 인용한 대한매일신보를 비롯해 황성신문 신한민보 등 신문과 일성록, 매천야록 등은 '彌(두루 미)'를 쓰고 있어, 당시에는 '襧'자와 '彌'자를 혼동하여 사용한 것으로 판단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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