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100년전 우리는

[89] 상공월보, 기업인 정신을 기르다

namsarang 2010. 4. 13. 20:18

[제국의 황혼 '100년전 우리는']
 
          [89] 상공월보, 기업인 정신을 기르다
 
1909. 8. 29.~1910. 8. 29.

 
 박기주 성신여대 교수·경제학 
 

 

▲ 윤정하(尹定夏)
"과거에 방패와 창으로 약탈하던 곳에는 주판이 대신하고 군대가 유린하던 곳에는 상인이 대신하며…멸국의 신법은 병전이 아니라 상전(商戰)이오 흥방(興邦)의 비결은 양군(養軍)이 아니라 양부(養富)이다."

1909년 11월 25일 창간된 상공월보 발간사의 일부이다. 조선인 경성상업회의소의 기관지인 상공월보는 상공업 관련 논설과 지식, 상업계 소식, 물가와 통계 등의 정보를 제공하여, 일본인 상업회의소의 월보를 방불하였다. 을사조약 이후 대한자강회 설립을 효시로 하여 많은 학회가 경쟁적으로 설립되고 애국 계몽적 잡지가 봇물 터지듯 등장한다. 그중 상공월보는 상공업자를 위한 국내 최초의 상업 전문지였기에 도하 신문의 기대 어린 각광을 받는다.

황성신문은 창간 축하 사설(1909.12.4.)에서 "국력의 허약과 민산(民産)의 경핍함이 극도에 달하여 생존할 수 없는 지경에 임박한 것은 실업계의 학식이 없는 연고인데 상공월보의 발간은 실업계의 일개 지침이 출현한 것과 같다. 이 잡지를 보면 세계 각국의 실업발달이 여하한 정도에 달한 것을 추측할 수 있으며 우리나라 실업계의 고유한 원료와 발전할 방침을 효득할 수 있다"고 하였다.

상공월보 편집을 담당하며 발행에 실질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 윤정하(尹定夏)는 1887년생으로 한성관립영어학교에서 수학한 후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고등상업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는 약관의 나이에 일본 유학생 단체인 대한흥학회가 매달 발행하는 잡지 '상학계'의 주필로 활동한다. '상공월보'와 '상학계' 그리고 공업월보사의 '공학계'(1909년 1월 창간), 이 세 잡지는 한말 실업계의 대표적 잡지이다.

        ▲ 1911년 9월의 제23호

윤정하는 글을 통해 상업계의 혁신을 위한 계몽운동을 하였을 뿐 아니라 직접 실업계와 학계에서도 활약하였다. 해동물산주식회사 이사 및 감사를 역임하고 호남은행 설립에 기여하고 한일은행 지배인 대리, 대구은행 지배인, 보성전문학교 교수, 연희전문학교 상과 교수, 진주일신여자고등보통학교 교장 등을 역임한다. 1938년에는 최초로 계리사(計理士) 영업을 하고 회계사무에 종사하였다.

창간 이후 상공월보는 제15호가 '치안 방해' 명목으로 압수당하는 일을 겪기도 하지만 순조롭게 발행되었다. 1911년 9월의 제23호는 창간 2주년을 앞두고 다음의 사고(社告)를 내보낸다.

"오는 10월호는 만 2개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재료도 더욱 풍부히 수집 게재할 뿐 아니라 부수도 장차 월수히 증간 발행하기로 하며 특히 경성 내 유수한 실업가의 초상(肖像)을 삽입하고 저명한 성공가의 실험담을 등재하여 원근 인사에게 감히 소개하는 영광을 얻고자 하는 바임."

'광고료도 파천황적으로 할인하니 많이 주문해달라'는 급고(急告)까지 실으면서 발전을 예고했으나 10월 말 발간된 제24호는 치안 방해로 압수되고 발행금지를 선고받는다(경무월보 17호). 이로써 2주년 기념호는 종간호가 되고 말았지만 상공월보는 조선인의 상공지식을 향상시키고 인천 조선인상업회의소가 1912년에 상계월보(商界月報)를 발간하는 모범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