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100년전 우리는

[91] 한강 얼음판의 잉어낚시

namsarang 2010. 4. 15. 23:29

제국의 황혼 '100년전 우리는']
 
                      [91] 한강 얼음판의 잉어낚시
 
1909. 8. 29.~1910. 8. 29.
 
정진석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언론정보학
 

한강 얼음판 위에서 낚시질하는 풍경은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 뉴스' 1913년 4월 5일자에 실렸다. 두꺼운 두루마기에 흰색 남바위(옛날 방한모)로 매서운 바람을 막고 굽 높은 나막신을 신은 강태공들이 얼음 구멍에 낚시를 드리운 채 잉어의 입질을 기다리고 있다. 남바위는 속에 털이 붙은 가죽을 대고 겉은 비단 같은 천으로 만들어 이마를 덮고 뒤로는 귀를 거쳐 목과 등까지 내려오며 위쪽에는 구멍을 뚫었다. 긴 담뱃대를 문 사람도 있고, 끝 부분에 얼음을 깨는 쇠뭉치가 달린 몽둥이를 옆에 놓거나 세워두기도 했다. 나라를 빼앗긴 뒤 네 번째 맞는 겨울이지만 한강의 얼음낚시 풍경은 변함이 없었다.

▲ 나막신을 신은 강태공들이 얼음 구멍에 낚시를 드리운 채 잉어의 입질을 기다리고 있다.

한강의 얼음은 궁중 용도로 채빙하여 동빙고와 서빙고에 저장되었다. 동빙고는 제향(祭享)과 공불(供佛) 등에 쓸 얼음 1만2044정(丁)을 저장하고 서빙고에는 임금에게 올리는 음식인 어선(御膳)과 빈식(賓食), 그리고 백관에게 나눠 줄 얼음 13만4974정을 보관하였다. 겨울이 오면 얼음이 두껍게 얼기를 기원하는 사한제(司寒祭)를 지냈다. 한강의 얼음은 대개 12월에 얼기 시작하여 3월 초에야 녹아 배들이 마포에서 제물포로 내왕할 수 있었다.(독립신문, 1897.3.9.).

나라의 운명이 꺼지는 등불 같았던 1910년 겨울은 유난히 추웠고 20년 이래 가장 단단한 얼음이 한강을 덮었다. 일본인이 발행하던 '조선일출신문'(일본어)은 용산 전차 종점 앞 한강에서 2월 6일 스케이트 경기를 열었다. 주한일본군 사령관을 비롯하여 일본인 관인 수백명이 참관한 행사였다(신보와 황성신문, 1910.2.6.). 1920년대로 넘어와서는 여러 지역에서 빙상경기가 열렸다.

'백열화(白熱化)한 빙상 경기회/우승의 노관은 김상룡(金相龍)군에게, 2·3등도 전부 조선인 선수'와 같은 기사를 볼 수 있고(조선일보, 1924.1.14.), '한강빙상에 인파/ 5일 오후부터 열린 빙상경기 전조선에서 21단체 참가'(〃,1925.1.6.), '빙상의 용자(勇者) 이복남(李福男), 신기록을 작성. 금동(今冬) 시즌에 장거(長距) 3종을'(〃,1927.1.31.)처럼 1920년대에는 빙상경기에 많은 관심이 쏠렸음을 보여준다.

한강의 얼음은 여름에 사용할 귀중한 자원의 가치를 지녔다. 총독부 산하 서울 위생과 관리들은 채빙 현장을 답사하여 얼음 속에 먼지나 이물질이 스며들었는지 여부를 먼저 검사한 다음에 채빙을 허가하여 1월 중순부터 작업이 진행되었다. '한강 채빙도 일본이 독점'(조선일보, 1929.1.11.)은 얼음 채취에도 일인들의 손길이 뻗쳤음을 말해준다. 압록강과 대동강에서도 얼음을 채취했다. 여름에 기온이 상승하면 값이 크게 올라 강원도 철원에서 운송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저장량과 품질에 따라 그해 여름 얼음 수요를 점치는 기사도 실렸다(〃, '근년은 얼음 풍년/1월 중순 2천톤', 1928.1.28.).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 뉴스'는 사진에 한국인들이 영국제 낚싯바늘로 겨울 스포츠를 즐기고 있다는 설명을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