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당문 밖에서 7~8간(약 14m) 되는 데 이르러서는 단발한 사람 한 명이 돌출하여 8치(약 24cm) 남짓한 한국칼로 인력거 끄는 차부부터 꺼꾸러뜨리고 몸을 소스쳐 차 위에 앉은 이완용씨의 허리를 찌르매 이씨가 달아나려 하거늘 이씨의 등을 찔러서 3군데 중상을 입혔는데, 그 자객은 평양사람 이재명이라 즉시 포박되었다더라."('대한매일신보', 1909. 12. 23.).
- ▲ 이재명(왼쪽)1989년 건설당시의 종현(鐘峴) 천주교당(명동성당)(오른쪽)
이재명의 칼에 맞아 인력거꾼 박원문은 즉사했고, 이완용은 폐와 신장에 치명상을 입었다. 이재명(1890~1910)은 평안북도 선천(宣川) 태생으로 평양에서 성장했다. 1904년 노동이민으로 하와이로 이주했으나, 제1·2차 한일협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국권 회복을 위해 1907년 나가사키를 거쳐 귀국했다. 1909년 1월 이토 히로부미가 순종과 함께 평양을 순행했을 때, 이토를 암살하기 위해 동지를 규합해 평양역 부근에 대기했으나 순종의 안전을 우려한 안창호의 만류로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그 후 연해주로 망명해 국권 회복의 길을 모색하던 중 안중근이 이토를 사살했다는 소식을 듣고 매국노 이완용을 처단하기 위해 귀국했다.
거사 당일 이재명은 육혈포(권총)와 칼을 품고 군밤장수로 위장해 종현천주교당 앞에서 이완용을 기다렸다. 그는 평소 육혈포로 이완용을 심판하겠다고 별렀지만, 무슨 까닭인지 거사에서는 육혈포 대신 칼을 이용했다. 그 덕분에 이완용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지만, 여생을 해수병 천식 폐렴에 시달렸다. 이재명은 체포된 이후에도 당당함을 잃지 않았다.
"이재명을 포박할 때에 방관자가 구름같이 모였는데, 그 신색이 자약(自若)하여 사방으로 돌아보며 왈 '너희 등은 어찌 나를 돕지 않고 방관만 하느냐' 하고, 또 하는 말이 '내가 오늘날 우리나라 원수를 죽였으니 쾌하다, 쾌하다' 하고 만세를 부르며 방관자에게 궐련을 청하여 먹는데, 그 거동이 여상(如常: 평소와 다름없음)하더라더라."('신보' 1909. 12. 24.).
재판 과정에서 판사가 배후를 묻자 이재명은 "이완용을 살해한다 하면 우리 이천만 동포가 모두 찬성치 않을 자 없을 것이오. 이천만 동포 모두가 배후요"라 답변했다. 증거물로 제시된 칼이 "행흉(行凶)할 때 사용된 것이냐"는 질문에는 "행흉하는 데 쓰던 것이 아니라 매국노 이완용을 죽이는 정의를 위해 사용된 것"이라 답변해 방청석을 가득 메운 방청객들의 갈채를 받았다. 이재명은 강제합방 보름 후 경성감옥(서대문형무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가 이완용을 살해하는 데 성공했다 하더라도 강제합방을 막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거사는 한국인들이 합방을 원치 않으며 매국노는 언제든 처단될 수 있다는 사실을 세상에 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