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100년전 우리는

[94] 평양 항일운동 이끈 안창호와 이시영

namsarang 2010. 4. 18. 15:55

 [제국의 황혼 '100년전 우리는']

 

[94] 평양 항일운동 이끈 안창호와 이시영

 

  • 김기승·순천향대 교수·한국사

1909. 8. 29.~1910. 8. 29.

"연회에서 이토 통감이 연설을 하는데 대한협회 부회장은 통감의 연설을 듣지 않고 연회장 뒤뜰에서 기생과 함께 있었고, 반일사상이 있는 안태국과 차이석은 우리나라의 전도를 생각하지 않고 차관을 제공하는 처사에는 참을 수 없다고 했다. 또 환송식에 학생들이 일본 국기를 갖고 오지 않았는데, 안창호와 길선주 등의 교시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또 그들은 통감에 대한 만세와 탈모를 금지시켰다. 안창호 등은 진실로 경찰의 말에 불복하며, 학부의 훈령을 무시한 행동을 한 것이 인정된다."('황제폐하 서북순행에 대한 일반민의 반응보고의 건'(1909. 2. 5.), '한국독립운동사').

안창호(왼쪽사진) 1950년 10월 24일 부통령 시절 유엔 행사에 참석한 이시영(오른쪽사진)

평양일본인 관리가 이토 통감에게 평양 민심 동향을 보고한 내용이다. 1909년 안태국(安泰國)과 안창호(安昌浩)등 평양의 사회 지도자들은 평양 시민들이 일본에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으며 국권회복 의지가 강하다는 것을 이토에게 보여주었다.

평양시민들의 구국 의지는 뿌리가 깊다. 1907년 3월 평양상무협동회 회장 안태국이 경찰에 체포되자, 상인들은 시민과 연합하여 8일간 철시 투쟁을 전개했다. 이후 '평양의 가두에서 한인과 일본인 사이의 쟁투는 매일 견문하는 바가 되었고, 한국인은 결사대를 조직하여 상경하려는 세를 보여 배일(排日)의 기염은 날로 치열해져서 일진회와 일본의 세력은 점점 쇠약해져' 갔다는 것이다.

평양 여론이 심상치 않자 일진회를 만들어 한국 '병합' 공작을 펴던 우치다 료헤이(內田良平)는 1907년 4월 6일부터 12일까지 평양에 머물며 대책을 강구했다. 그가 이토에게 올린 '안창호의 귀국과 평안도 민정에 관한 비밀보고서'는 '평양 시민들이 통감부의 시정이 처음부터 잘못되었으며 통감부를 불신하고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했다.('한국독립운동사').

일본은 항일운동의 중심인물이 기독교 구국 연설을 행한 안창호였다고 보았다. 안창호는 '기독교의 소굴'인 평양에서 "기독교를 믿으면 천하에 적이 없다. 이토 통감도 기독교를 두려워한다. 대한의 황실이 지금 위태롭다. 교도를 모아서 매일 기도회를 열어야 한다. 기독교도들은 결사대를 결성하여 상경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평양의 구국운동은 평남 관찰사 이시영(李始榮)을 비롯한 관리들의 후원을 받고 있었다.

"평양에는 민회 있으며, 자강회 있으며, 청년회 있으며, 서우학회 있으며, 상업회의소 있는데, 모두 기독교도로서 관리와 서로 결탁해 있다. 고로 안창호가 명륜당에서 연설하자 방청인은 관찰사 및 강서군수 이하 각 관리 포진열좌하였다. 10일에는 안창호와 이시영이 좌우를 물리치고 4시간에 걸쳐 밀담을 나누었다."(우치다, '~비밀보고서')

이시영은 평남 관찰사로서 대한자강회와 청년회 회원을 관리로 발탁했으며, '첫째도 배일, 둘째도 배일하여 음양으로 일본 거류민과 대립'하며 국권을 수호하는 데 앞장섰다. 그는 안창호와 함께 비밀결사 신민회를 이끌었던 이회영(李會榮)의 동생이었다. 이후 안창호와 이시영은 중국에서 임시정부를 이끄는 등 독립운동의 동지로 평생을 함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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