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지석영(池錫永)
이 광고를 낸 국문연구소는 1907월 8일 학부에 개설되었는데, 학무국장 윤치오(尹致旿)를 위원장으로 하고 이능화(李能和), 어윤적(魚允迪), 현은, 권보상(權輔相), 주시경(周時經) 지석영(池錫永), 윤돈구(尹敦求) 등이 연구위원으로 참여했다. 한문이 폐지되고 국문 사용이 일반화되면서 국문의 원리, 연혁, 행용(行用), 장래의 발전 등에 대한 국가 차원의 연구와 새로운 어문정책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 연구소에서는 매월 3회의 연구회를 개최한다는 원칙에 따라 모두 23회의 회합을 거쳐 국문 표기 체계와 관련된 중요 원칙을 정했다. 'ㆅ ㅱ ㅸ ㆄ ㅹ ◇ △ ㆆ' 등의 고문자를 더 이상 사용하지 않기로 했으며, 된소리의 표기에서 'ㄲ ㄸ ㅃ ㅆ ㅉ' 과 같은 각자병서(各字竝書) 원칙을 확립했다. 종성(밭침)에 ㄷ ㅈ ㅊ ㅋ ㅌ ㅍ ㅎ 등을 사용하는 원칙이라든지 자모의 배열순서 등도 모두 확정하였다.
앞의 신문 광고는 국문의 문자 체계와 그 용법에서 쟁점이 될 수 있는 안건에 대한 여론 수집의 방식으로 고안된 것이다. 국민의 언어 문자 생활을 편리하게 도모하는 일은 중대한 사회 문화적 과제였기 때문에 이에 관심을 갖고 있는 일반인들의 의견도 함께 취합하고자 했던 것이다. 일반인들의 많은 참여를 독려하기 위해 신문 광고의 끝에 의견을 보낸 사람들의 명단을 공개한 적도 있다. 구한말에 중요 국책 사업의 수행을 위해 사회 일반의 여론을 이런 방식으로 수용한 경우는 달리 찾아볼 수가 없다.
- ▲ 국문연구 의정안(議定案)
국문연구소는 2년 반 정도의 짧은 기간 동안 운영되었지만 1909년 말에 그 연구 성과를 정리하여 '국문연구 의정안(議定案)'을 제출했다. 국문의 문자체계와 그 표기방법에 대한 근대적 규범을 국가적인 연구 사업을 통해 확정한 것이다. 이 성과물은 1910년 일본 강점에 의해 사회적으로 시행되지는 못하였지만, 한글학자들이 새로 만든 '한글 맞춤법 통일안'(1933)의 중요 규범의 토대가 모두 여기서 비롯된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국권은 무너져내리고 있었지만, 한민족의 혼인 국어의 체계를 정립함으로써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정신적 토대를 닦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