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100년전 우리는

[108] 신라 왕릉을 파헤친 '日人 도적놈들'

namsarang 2010. 5. 3. 22:09

[제국의 황혼 '100년전 우리는']

 

[108] 신라 왕릉을 파헤친 '日人 도적놈들'

  • 김기승 순천향대 교수 · 한국사

1909. 8. 29.~1910. 8. 29.

'일인 만행', '일인 도적놈', '개만 못한 일인 놈', '야만 일인 놈의 야만 행실'….

1910년 1월부터 3월까지 대한매일신보(이하 신보)에 보도된 일본인 범죄 사건 기사 제목이다. 1905년 4만명 수준이던 한국 거주 일본인은 1910년 17만명에 달했는데, 서울에만 3만8000명이었다. 일본인이 40% 이상이 된 도시는 목포·대전·신마산 등 16개 도시에 달했다. 일본인의 직업으로는 상업이 제일 많았고, 잡업·관리·공업·노동 순이었다. 무직자와 부랑인도 많아 서울의 경우 10% 정도를 차지했다.

한국에 일본인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일본인 범죄가 사회 문제로 대두했다. 일본인이 가장 많이 저지른 범죄는 부녀자 강간이었다. 13세 소녀를 강간한 사건도 있었고, 강탈당한 딸을 찾으러 온 아버지를 칼로 죽여 그 아들에게 죽임을 당한 일본인도 있었다. 일본인 범죄는 권력의 비호를 받는 경우가 많았는데, 전형적 사례는 '개만 못한 일인 놈'이라는 기사이다.

"평남 증산군의 일본 순사 이와타 자부로는 그 고을에 사는 최리섭의 아내를 여러 번 강간하였는데, 지난 9일 밤에 최리섭의 내외가 같이 자는데 이와타가 또 담을 넘어오는지라 리섭이가 그 무례함을 책망한즉, 이와타가 도리어 한국인 순사 이원식을 불러 최리섭 내외를 결박하고 행패가 무쌍하였다더라."(신보, 1910.2.1.)

다음으로 많은 기사는 강도였다. 총칼로 무장한 서너명의 일본인 도적들은 기차를 타고 이동하면서 강도짓을 저질렀다. 주요 목표는 문화재였다.

"일본인 도적들이 고물(古物)을 도적하기 위하여 안문성공(안향)의 분묘를 파굴하야 해골을 헤쳐 버리고 도주하였으므로 안씨 종중에서는 어찌 조치할지 몰라 지금 회의하는 중이라더라."(신보, 1910.3.30.)

일본 궁내대신 다나카(田中光顯)가 1907년 개성의 경천사 10층석탑〈왼쪽 사진〉(국립중앙박물관에 복원된 모습)을 해체해 일본으로 반출했고, 일본 도굴꾼들은 경주 신라 왕릉〈오른쪽 사진〉(2009년 여름 벌초작업 중인 신라 왕릉)을 파헤쳐 자기와 귀중품을 도적질하다 잡혔다.(신보, 1910.2.13.) 경남 밀양에서는 일본인이 산림 개발권을 얻었다고 수백기의 무덤을 파내어 후손들의 집단 항의를 받았다.(신보, 1910.3.23.) 강간과 도굴은 일본인 범죄의 두 축이었는데, 남녀유별과 조상숭배의 전통이 강한 한국인에게 '야만 일인 놈'의 상징으로 비쳤다.

"슬프다. 저 일본이 근일에 한국보다 승(勝)하다는 것은 다만 구라파의 문명을 수입하는 데 한국보다 먼저 한 것뿐이다. 그러나 그 취한 것은 정책뿐이며 기술뿐이오, 도덕상에는 일호도 진보된 것이 없는지라. 이러므로 여자는 매음하는 것으로 성경을 삼으며, 영업하는 자는 속이기로 장기를 삼고, 여름이면 벌거벗고 남녀가 혼잡하여 지내니 한국인이야 아무리 도덕이 부패하였을지라도 오히려 저희보다 얼마쯤 장처(長處)가 있지 아니할까."(신보, 1910.1.14.)

당시 언론은 일본인의 야만적 폭력성을 한국인의 높은 도덕성과 대비시켜, 총칼에 짓밟힌 민족의 자존심을 환기하고자 했던 것이다.

일본의 빗나간 추억… 원폭피해는 면죄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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