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김혜숙 2007년 탈북
核 연구하던 남편이 방사능에 오염됐다
환각 증세와 악몽에 시달렸다…
간첩 혐의에 걸린 남편을 구하려 보위부
간부에 몸 바쳐야 했다…
중국서 돈벌어 되돌아간 北에서 내게
선물한 것은 감옥살이였다. 10개 감옥을
전전한 나는 60대 초췌한 할머니로 변했다
남편은 핵(核)과학자였다. 1980년대 초반부터 북한의 핵개발에 참여하고 있던 남편은 국방과학연구소에서 근무하면서 핵원자로 연구를 진행하다가 핵물질에서 방출되는 방사선에 오염되는 사고를 당했다. 1989년 결혼 초기 남편은 이부자리에 오줌을 지리는 실수를 했다. 나는 그것이 방사능 오염으로 인한 요실금 증상인 줄은 나중에야 알았다.남편은 피부가 한 벌 벗겨지고 간도 굳어지고 있었다. 고위 간부들만 치료받는 평양봉화연구원도 갔지만 증세가 쉽게 호전되지 않았다. 나중에는 환각 증세를 일으키며 이불 속에서 무엇이 두려운지 벌벌 떨며 나오지 못했다.
남편은 자기가 직접 조립한 라디오로 거의 매일 한국과 외국 방송을 몰래 들었다. 조선중앙방송 뉴스에서 "미제와 남조선 괴뢰도당은 우리나라에 있지도 않은 핵 소동을 떠들면서 공화국을 협박하고 위협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 "있지도 않다니? 우리가 지금 만들고 있는데, 왜 거짓말을 하나"라고 혼잣말 하듯 되뇌었다.
남편은 밤마다 악몽을 꾸면서 헛소리를 했다. 몸의 고통을 잊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술을 마시거나 여자들과 밤을 지내고 오기도 했다. 보위부 안전부 등에선 늘 그의 뒤를 밟았다. 남편은 간첩 혐의로 보위부에 끌려간 후에는 이빨이 하나도 없이 몽땅 빠지기도 했다. 나는 남편을 구하기 위해 보위부 간부에게 청원하면서 두 남자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악몽 같은 시간이었다.
노동당 집안 출신으로 이름 있는 예술가의 딸로 태어나서 '장군님'의 친필 지시로 대학공부도 마쳤던 나는 중앙당 안전부나 보위부 등 잘나가는 신랑감들과 만나 평범하게 살 수도 있었다. 그런데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북한사회에서 서자(庶子) 취급받고 정치 희생양이 되기 일쑤인 조총련계 청년을 선택한 것이 불행의 시작이었다.
- ▲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burbuck@chosun.com
나는 1998년 탈북을 감행했다. 탈북 당시 30대 초반으로 젊었던 나는 유흥업소 유혹이 많은 중국 땅에서 자신을 지키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언젠가는 사랑하는 가족에게 다시 돌아가 내가 그들의 희망이 되고 행복이 될 날을 꿈꾸면서 두더지처럼 숨어 열심히 일했다. 잡혀갈 위험 때문에 내내 가슴을 조이면서도 한국이나 3국으로 가는 길엔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조국'이 나를 기다리기나 하는 것처럼 돈을 많이 벌어서 언젠가 고향에 돌아가리라 마음먹었기 때문이었다.
2003년 이 무지한 여자는 북한에 있는 가족과 아이들이 보고 싶어 북한으로 향했다. 마음을 다잡고 들어가려다 체포된 나에게 북한이 선물한 것은 감옥살이였다. 그렇게 돌아가고 싶던 '조국', 꿈에서도 잊은 적 없는 사랑하는 가족과 상봉의 꿈은 이렇게 처참하게 무너졌다. 넉달 동안 보위부 조사를 받은 후 평양감옥으로 이송되는 도중 또다시 기적적으로 탈출해 중국으로 넘어갔다. 하지만 남루한 옷차림에 야윈 몸, 겁에 질린 눈동자는 아무리 중국말을 유창하게 해도 사람들의 의심을 사기에 충분했다. 나는 중국 공안에 다시 체포되었다. 이번에는 정말 살아날 가망이 없었다. 중국 내몽고 알랜변방대, 중국 북경 공안, 중국 단동변방대, 신의주 보위부 월경자 집결소, 평양보위부, 증산11교화소 등 무려 10개의 감옥을 전전하며 3년을 보냈다. 50㎏이던 몸은 26㎏으로 줄었다. 10년이나 나이를 아래로 보게 했던 동안(童顔)의 모습은 사라지고, 60세 넘은 초췌한 할머니로 변했다. 보는 사람은 누구나 할머니라 불렀다. 손과 발은 얼고 데어 흉터투성이고 마른 장작 같아 어디서나 손을 내밀지 못할 정도였다.
감옥에서 나는 북한이라는 세상을 새삼 다시 알게 되었다. 내가 다시 한 번 자유를 찾는다면 무엇을 할지도 깨닫게 되었다. 나는 죽을 각오를 하고 다시 탈북했고 2007년 한국에 왔다. 그날 나는 "이제는 살았구나. 이제는 누구도 더는 나를 괴롭힐 수 없겠구나" 하는 안도감으로 오랜만에 감사와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북한감옥에는 아직도 수많은 형제들이 죄없이 피눈물 나는 고통을 당하고 있다. 허리를 펴지 못하고 개구멍 같은 문으로 기어나가 기약 없이 떠나버린 감방 동료들…. 단추와 지퍼들이 다 떨어진 해진 옷 꾸러미들, 이와 빈대들이 버걱버걱한 옷들, 서너 달씩 빨아 입지 못한 옷을 둘둘 말아 베고 자면서 초라한 꾸러미를 부둥켜안고 떠나간, 눈물조차 말라버린 그 눈동자들을 결코 잊을 수 없다.
나는 지난해 말 내가 겪은 이런 이야기를 소설 형식으로 책을 펴냈다. 북한에서 인권이 어떻게 유린되는지, 그리고 21세기에 이런 지옥이 존재한다는 가슴 아픈 사실을 세상에 알리고 싶었다. 북한 전 노동당비서 황장엽 선생은 내 책에 '인간이고 싶다'라는 제목을 붙여주셨다.
북한 사람들도 인간이고 싶은 욕구와 본능의 세계가 있다. 그들도 인생을 선택할 기회가 있고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를 누릴 권리가 있다. 그러나 정녕 북한에 그런 사회가 언제 올까. 나는 오늘도 북녘땅 형제들의 자유와 평화를 위해 기도한다.
(※편집자 주·필자 요청에 따라 사진을 모자이크 처리했습니다)
"북한 탈출하다 죽은 아이들, 세렝게티서 죽은 얼룩말과 닮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