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6.25전쟁60주년

48년 소위로 '제주 4·3'에… 전쟁은 이미 시작됐다

namsarang 2010. 5. 24. 23:11

[나와 6·25]

48년 소위로 '제주 4·3'에… 전쟁은 이미 시작됐다

[나와 6·25] [41] 채명신 前 주월사령관 <上>


길거리에 경찰시체 뒹굴고 중·대대장까지 모두 남로당 나도 암살 대상, 겨우 살아나
태백산서 빨치산과 맞설땐 당시 국군 군기 정말 엉망… 주민 민심 얻은후 토벌 완수

1947년 1월 말 평안남도 진남포 인근 덕해교회. 어머니가 권사로 계신 이 교회에 들이닥친 공산당원 4~5명이 다짜고짜 "교회를 접수한다. 내일 당장 문을 닫아라"고 했다. 난 "이 땅엔 종교의 자유도 없느냐"며 버텼지만 그들은 "동무는 말이 많구만. 반동이야"라고 했다. 반동은 인민의 적이다. 한번 낙인 찍히면 한밤중에 쥐도 새도 모르게 끌려가 사라진다. 어머니는 "꼭 살아야 한다"며 내 등을 떠미셨다. 그날 밤 나는 무작정 남쪽을 향해 집을 나섰다. 평생을 바친 공산당과의 길고 긴 싸움의 시작이었다.

"함께 하자"는 김일성의 손을 뿌리치다

1946년 2월 8일 평양학원 개원식 때 김일성을 만났다. 이 학원은 공산당과 군의 주축 간부를 양성하는 북한의 핵심 정치군사학교다. 행사에는 소련군과 북한의 수뇌부가 모두 참석했다.

채명신 전 주월 한국군사령관이 지난 13일 서울 이촌동 자택에서 6·25 전쟁에 얽힌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오종찬 기자 ojc1979@chosun.com
원장인 김책이 나를 김일성에게 소개했다. 김책과는 3개월 전 평양학원 설명회 때 만났다. 덕해국민학교 교사였던 내가 사회주의 이론을 알고 있고, 내 아버지(채은국)가 항일 독립운동가였다는 사실에 깊은 인상을 받은 그가 나를 개원식에 초대했다.

김일성은 볼살이 통통했으나 잘 생긴 편이었고 호탕해 보였다. 윗니는 뻐드렁니였고, 치아가 톱니처럼 불규칙해 크게 웃을 때 좀 혐오감을 줬다. 그는 내 손을 덥석 잡으며 "말 많이 들었소. 나와 함께 평양에 가지 않겠소"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즉답하지 않았다. 이미 사회주의의 허구성을 꿰뚫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해방 정국에서 짧게 교우한 소련군 장교가 있었다. 모스크바에서 대학을 다닌 그는 총위(대위와 소령 사이) 계급이었고 지적이었다. 그가 사나이로서 비밀을 지킨다는 약속을 받고 한 말은 충격이었다. 그는 소비에트 사회에 계급이 없다는 것은 거짓이라고 했다. 나를 군부대에 초청해 실상을 보여주며 '붉은 군대'에조차 여러 계급이 존재한다고 했다. 그를 미리 만나지 못했다면…. 지금 생각하면 끔찍한 일이다.

첫 근무지 제주도…. 전쟁은 이미 시작됐다

월남 3개월 만에 육사 5기 생도가 됐다. 목사가 되려 했지만 시대가 너무 혼란스러웠다. 전쟁준비에 혈안인 북한 앞에 남한은 촛불처럼 위태로웠다. 1948년 4월 소위 임관과 함께 처음 배치된 곳은 제주도 9연대. 첫날 묵은 여관 옆 골목길에는 폭도들에게 맞아 죽은 경찰관 시체가 나뒹굴었고, 서북청년단원들이 죽창을 들고 거리를 활보했다. 이른바 4·3사건이었다. 그곳엔 이미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우리 군 내부에도 남로당이 깊숙이 침투해 있었다. 내 직속상관인 문상길 중대장과 대대장, 특무상사 등도 남로당이란 게 나중에 드러났다. 나는 소대원들 앞에서 첫 취임인사를 하는 자리에서 당장 나를 때려죽일 것 같은 증오의 눈초리를 보았다. 인사말을 하는 둥 마는 둥 단상을 내려왔다.

두 달 만에 충격적 사건이 터졌다. 박진경 연대장이 부대 안에서 적에게 암살당했다. 4·3사건 주동자인 김달삼 지령을 받은 문상길이 심복인 특무상사에게 지시, 특무상사가 위생병(양해천)을 시켜 연대장을 쐈다. 범인들은 잡혔지만 문상길 심문과정에서 나도 그들의 암살 대상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문득 얼마 전 계곡 물웅덩이에서 목욕을 하다 총격을 받은 일이 생각났다. 총알은 내 옆구리를 스쳐 웅덩이 옆 흙 속에 박혔다. 연대장 암살 사건으로 9연대는 해체되고 11연대로 편입됐다.

1952년 2월 3일 한국군 사단 사령부에서 당시 제5연대 연대장이었던 채명신(오른쪽) 대령이 이 연대의 미 군사고문관 레이몬드 플래허티 소령과 함께 찍은 사진. /미 국립문서기록보관청(NARA)
육탄10용사의 군인정신

1949년 5월 3일 개성 북방 송악산 일대. 인민군 1사단 3연대 소속 대대병력이 38선 일대 진지 구축 공사를 하고 있던 우리 부대를 기습 공격했다. 다음 날 새벽 나의 4중대와 육사 동기 김영직 대위의 하사관교육대가 각각 좌측 송악산과 우측 비둘기고지 탈환에 투입됐다. 공격 때 적 따발총탄에 왼쪽 가슴을 맞았다. 쓰러지기는 했는데 가슴을 만져보니 멀쩡했다. 총알이 왼쪽 주머니에 달려있는 커다란 강철 단추에 맞은 것이다. 우리 중대 목표는 달성됐는데 옆 비둘기고지에서는 적 토치카에서 불을 뿜는 기관총 때문에 아군 피해가 컸다. 소대장과 분대장이 총에 맞아 뒹굴었다. 장병들 눈에 불꽃이 튀었다. 특공대 10명이 81㎜ 박격포탄을 안고 적 토치카에 돌격했다. 이들이 바로 '육탄10용사'다. 그들의 희생으로 비둘기고지를 탈환했다. 적을 격퇴하기 위해 목숨을 초개처럼 바친 이들의 군인정신…. 나는 우리 군에 면면히 이어 내려오는 이 위대한 군인정신을 이후 6·25 전쟁 때도, 베트남전에서도 봤다.

이후 나의 전장(戰場)은 태백산지구로 옮겨졌다. 당시 강원도·경북 산악지대엔 북에서 남파한 유격대와 지역 빨치산이 합세해 게릴라전을 펼치고 있었다. 북은 2500여명의 유격대를 100명 단위로 해상과 산악을 통해 침투시켰다. 그곳은 낮엔 대한민국, 밤엔 인민공화국이었다. 현지에 가보니 국군 부대는 군기 빠진 오합지졸에 대민관계도 엉망이었다.

민심을 얻고 적을 소탕하다

국군은 적만큼이나 주민들에게 '몹쓸 놈들'이었다. 멋대로 닭·돼지를 잡아먹고 식량과 김치를 퍼다 먹었다. 군기를 세우는 게 급했다. 부대원 외출을 금지시키고 영내 훈련을 강화했다. 기상과 함께 군가를 부르며 마을 주요 거리를 청소하도록 했다. 제법 부대 꼴이 갖춰지자 장병들 사기도 높아졌다. 이어 장병들이 맘대로 걷어 먹던 곶감을 시장가격보다 더 비싸게 쳐주며 사 먹었고, 남아도는 어민들의 생선도 사들였다. 그러자 민심이 우리 쪽으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그런 다음에 나는 주민들에게 한 가지 부탁을 했다. 적들이 마을에 내려와 가져간 쌀의 양과 물품들, 사람의 수, 어느 쪽으로 갔는지 등을 알려달라고 했다. 지도에 이 내용들을 기록하니 적의 이동경로·병력규모·아지트위치 등이 한눈에 파악됐다. 그때부터 적이 나타나면 우린 한발 앞서 다음 이동경로에 매복하고 있다가 기습 공격을 했다. 나의 1대대 2중대는 영덕지구 빨치산 토벌을 완수한 부대로 이름을 떨쳤다. 군이 주민들의 신뢰를 얻어야 전투에서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은 훗날 베트남전에서 대민심리전을 펴는 동력이 됐다.

태백산 전투 때 마지막으로 어머니를 뵈었다. 내가 고향을 떠난 이후 가까스로 월남, 인천에 정착했던 어머니가 수소문해 찾아오신 것이다. 함께했던 3주일은 행복했다. 하지만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6·25 전쟁이 터지자 어머니는 곧바로 인민군에 끌려가셨고 지금까지 소식을 모른다.

[미니 戰史]

[21] 중공군 3차공세와 1·4후퇴

  • 서상문·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

"서울 뺏어라" 모택동 명령… 팽덕회의 '中·朝연합' 9개군단 밀물

중공군의 제2차 공세로 38도선까지 후퇴한 국군과 유엔군은 김포반도-임진강-화천-양양을 잇는 선을 주저항선으로 삼고, 김포반도에서 포천·김화에 이르는 지역에는 미 제1·9군단을, 중부 산악지역에는 국군 제2·3군단을, 동해안 지역에는 국군 제1군단을 배치했다.

12월 중순, 중공군총사령관 팽덕회는 극도로 지친 병력으론 미군 추격이 불가능하다며 모택동에게 전군의 휴식과 부대정비를 건의했다. 2~3개월간 휴식·정비를 한 뒤 이듬해 봄쯤 38도선을 돌파, 서울을 점령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모택동은 즉각 공격을 명령했다. 스탈린과 김일성의 강공(强攻) 주장을 무시할 수 없었던 데다 미국과의 휴전협상에서 유리한 입지를 차지하기 위해 최소한 37도선까지는 남하해야 한다는 전략적 고려 때문이었다.

중앙청서 춤추는 중공군… 1951년 1월 4일 서울을 점령한 중공군이 중앙청(1995년 철거) 건물 앞에서 춤을 추며 승리를 자축하는 모습. /
모택동의 강권에 따라 팽덕회는 1950년 12월 31일 제3차 공세를 개시했다. 오후 5시에 시작된 이 공세는 새해 첫날을 앞두고 실시됐다고 해서 '신정공세'라고 불렸으며, 중·북연합군 9개 군단 총 30만여명이 투입됐다. 북한군은 김일성이 12월 4일 '중·조연합사령부' 창설 때 지휘권을 중공군사령관에게 넘겨줬기 때문에 중공군의 지휘를 받았다.

적은 서부전선의 주공 5개 군단과 중부전선의 조공 4개 군단이 문산 우측의 국군 제1사단과 동두천의 국군 제6사단을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1951년 1월 2일, 국군 제1사단과 제6사단 주력이 상당한 타격을 입었고, 중부전선의 국군 제3사단도 집중공격을 받아 패퇴했다. 서울 동측방이 무너지자 서울지역 아군 10여만명의 퇴로가 차단될 위험에 처했다. 미 제8군사령관 리지웨이 장군은 이승만 대통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즉각 서울을 포기했다. 그는 전 부대를 한강-양평-홍천을 잇는 선으로 후퇴시켰다가, 3일 다시 수원오산을 지나 단숨에 37도선까지 물러나게 한 뒤 6일에는 평택-안성 방어선을 형성케 했다.

4일 밤, 서울은 중공군 제39군단 예하 1개 사단, 제50군단과 북한군 제1군단의 손에 떨어졌다. 또다시 수십만명의 피란민 행렬이 이어졌다. 적은 7~8일 수원·인천까지 점령했다. 하지만 중공군은 기동력이 뛰어난 미군을 따라잡을 수 없었고, 보급품을 소진해 더 이상 공세를 유지하기 어려웠다. 중공군은 1월 8일을 기해 대략 37도선에서 추격을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