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뺏어라" 모택동 명령… 팽덕회의 '中·朝연합' 9개군단 밀물
중공군의 제2차 공세로 38도선까지 후퇴한 국군과 유엔군은 김포반도-임진강-화천-양양을 잇는 선을 주저항선으로 삼고, 김포반도에서 포천·김화에 이르는 지역에는 미 제1·9군단을, 중부 산악지역에는 국군 제2·3군단을, 동해안 지역에는 국군 제1군단을 배치했다.12월 중순, 중공군총사령관 팽덕회는 극도로 지친 병력으론 미군 추격이 불가능하다며 모택동에게 전군의 휴식과 부대정비를 건의했다. 2~3개월간 휴식·정비를 한 뒤 이듬해 봄쯤 38도선을 돌파, 서울을 점령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모택동은 즉각 공격을 명령했다. 스탈린과 김일성의 강공(强攻) 주장을 무시할 수 없었던 데다 미국과의 휴전협상에서 유리한 입지를 차지하기 위해 최소한 37도선까지는 남하해야 한다는 전략적 고려 때문이었다.
- ▲ 중앙청서 춤추는 중공군… 1951년 1월 4일 서울을 점령한 중공군이 중앙청(1995년 철거) 건물 앞에서 춤을 추며 승리를 자축하는 모습. /
적은 서부전선의 주공 5개 군단과 중부전선의 조공 4개 군단이 문산 우측의 국군 제1사단과 동두천의 국군 제6사단을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1951년 1월 2일, 국군 제1사단과 제6사단 주력이 상당한 타격을 입었고, 중부전선의 국군 제3사단도 집중공격을 받아 패퇴했다. 서울 동측방이 무너지자 서울지역 아군 10여만명의 퇴로가 차단될 위험에 처했다. 미 제8군사령관 리지웨이 장군은 이승만 대통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즉각 서울을 포기했다. 그는 전 부대를 한강-양평-홍천을 잇는 선으로 후퇴시켰다가, 3일 다시 수원과 오산을 지나 단숨에 37도선까지 물러나게 한 뒤 6일에는 평택-안성 방어선을 형성케 했다.
4일 밤, 서울은 중공군 제39군단 예하 1개 사단, 제50군단과 북한군 제1군단의 손에 떨어졌다. 또다시 수십만명의 피란민 행렬이 이어졌다. 적은 7~8일 수원·인천까지 점령했다. 하지만 중공군은 기동력이 뛰어난 미군을 따라잡을 수 없었고, 보급품을 소진해 더 이상 공세를 유지하기 어려웠다. 중공군은 1월 8일을 기해 대략 37도선에서 추격을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