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6.25전쟁60주년

"역사는 말합니다… 자신을 지킬 능력 없으면 평화도 없다고"

namsarang 2010. 5. 27. 23:08

[나와 6·25] [시리즈·끝]

"역사는 말합니다… 자신을 지킬 능력 없으면 평화도 없다고"

[43·끝] 정진석 추기경 '나와 6·25'를 읽고


용서에도 조건이 있어…
수많은 인명을 살상하고 한마디 사죄 없는 그들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을까
피란 못가 서울에 있다가 인민군에 잡혀… 의용군 입대 거부했지만 기적적으로 살아나
폭탄과 지뢰에 추위와 배고픔에 죽어가는 동료들 보며 사제의 길로 들어서

"'나와 6·25' 기사의 큰 글자(제목)만 봐도 60년 전이 바로 회상이 됐어요. 평소 기억하기 싫은 얘기지…. 너무나 비참해서 잊어버렸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잊은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았어요. 기사를 읽으면서 내가 직접 체험한 것처럼 실감이 났어요."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정진석(鄭鎭奭·79) 추기경은 지난 20일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정 추기경은 서울대 공대 화공과 1학년 재학 중 발발한 6·25 때문에 인생의 진로를 바꿨다. 그 이전까지 '발명가'를 꿈꿨던 청년이 전쟁의 참상을 경험한 후 '인간의 마음을 고치는 의사' 즉 사제로 진로를 변경한 것이다. 정 추기경은 마침 천안함 사고원인 조사결과 발표가 있던 이날 인터뷰에서 '용서의 조건' '정의' '평화'에 대해 강한 어조로 말했다. 평소 사적(私的)인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는 정 추기경은 이날 자신이 경험한 6·25에 대해서도 부분적으로 경험을 털어놓았다. 그는 특히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대비하라"는 라틴어 격언을 소개하며 철저한 대비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 지난 20일 명동성당 집무실에서 만난 정진석 추기경은 “‘나와 6·25’ 기사를 읽으면서 60년
전의 처참한 기억이 되살아났다”며 용서의 조건과 정의, 평화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6·25전
쟁의 참상을 경험한 후 사제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했다. /정경열 기자 krchung@chosun.com

조선일보가 6·25전쟁 60주년을 맞아 기획한 '나와 6·25' 기사가 40회 넘게 연재됐습니다. 신문에 실린 체험담을 읽으시며 어떤 생각이 드셨습니까?

"'나 혼자만의 체험이 아니었구나, 민족 전체의 크나큰 비극이었구나'하는 것을 새삼 확인했습니다. 한 맺힌 글들이었습니다. 다시는 전쟁이 없어야 한다는 점을 새삼 절감했습니다. 그러면서 '용서'의 의미를 다시 떠올렸습니다. '용서한다'는 말은 인간이 함부로 할 수 없는 말입니다. 진정한 용서엔 하느님의 은총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천주교에서 '용서'는 어떤 의미입니까?

"제가 종교인이니까 조건 없이 용서해줘야 한다는 대답을 기대하는 분이 있을 겁니다. 그러나 용서는 조건이 있습니다. 천주교의 고해성사(告解聖事)도 적어도 다섯 가지의 요건이 있습니다. 죄의 인정, 잘못했다는 자기반성, 다시는 잘못하지 않겠다는 뉘우침, 공개적 자백, 그리고 보상입니다. 집안에서 꼬마가 아무도 안 보는데 꽃병을 깼다고 합시다. 우선 자기가 깼다고 인정하고, 잘못했다고 반성하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뉘우친 후, 가족들에게 고백하고, 꽃병을 새로 마련하는 단계라고 보면 되지요. 이 다섯 가지 요건을 다 포함한 것이 고해성사입니다.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뉘우치고 용서를 청하지도 않는 대상에게 용서란 의미가 없습니다. 그 상대가 용서를 바라지도 않을 테고요."

―6·25전쟁과 관련해 '용서'를 말씀하신 의미는 무엇입니까?

"전쟁은 불의한 공격입니다. 이 핑계, 저 핑계를 다 대도 불의한 공격입니다. 불의한 공격자가 용서받으려면 진정으로 뉘우치고 사죄해야 합니다. 다시는 전쟁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약속도 한마디 사죄도 하지 않는 대상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겠어요? 용서는 정의에 입각한 용서라야 합니다. 불의가 정의로 회복돼야 용서할 수도 있고 용서받을 수도 있습니다. 불의가 정의로 회복된다는 것은 질서를 뜻합니다. 질서없는 평화는 있을 수 없고, 질서가 회복되려면 정의로워야 합니다. 그런데 정의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사랑이 중요합니다. 사랑 역시 정의를 기초로 해야 합니다.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 용서를 하는 것인데 정의와 질서가 회복되지 않으면 의미가 없지요."

―6·25전쟁의 경우, 학계 연구를 통해 북한의 남침이라는 것이 객관적으로 다 밝혀졌습니다. 방금 말씀은 북한에 대한 용서의 조건을 말씀하신 것으로 봐도 되겠습니까?

"(고개를 끄덕이며) 모든 전쟁에 해당됩니다. 전쟁 범죄자는 불의한 공격자입니다. 수많은 인명이 억울하게 살상된 것을 인간이 어떻게 함부로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불의한 공격자는 의도적입니다. 그리고 그 많은 생명이 희생된 것을 과연 어떻게 보상하겠습니까. 진정으로 뉘우친다면 모르겠지만 그렇지도 않은 것 같아요."

―2006년에 개정판을 낸 저서 '목동의 노래'엔 6·25 당시 인공 치하에서 고초를 당하는 젊은이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의 동생은 폭격으로 무너진 대들보에 깔려 숨지는 장면도 나오고요. 추기경님 본인의 이야기입니까?

"픽션이 있지만 기본적으로 제 이야기입니다. 그때 바로 옆에서 숨진 동생은 6촌 동생이고 저는 구사일생으로 살았지요. 저는 피란을 가지 못하고 서울에 남았었습니다. 책에도 대략적인 팩트를 썼지만 숨어 있다가 가택수색에 걸려 '반동분자'로 끌려가 죽거나 의용군에 끌려갈 뻔 했습니다.('목동의 노래'엔 취조를 받던 중 '죽기 싫어 의용군 나가지 않았다'는 그에게 인민군 장교가 권총을 장전해 겨냥하는 대목도 나온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몰라도 기적적으로 살아났어요. 이번에 조선일보 연재를 보니까 거기에도 저처럼 기적으로 살아난 분들 사연이 있더군요. 그때를 살아본 분은 알겠지만 살아난 사람도 그때 어떻게 살아났는지 모를 기적이 많았어요. 그때 '내 생명은 내 것이 아니구나'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살아남는다면 나를 위해 살지 않고 남을 위해 살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정 추기경은 평소 자신과 관련된 사적인 이야기를 극구 사양한다. '목동의 노래'에도 자신의 이야기가 '나'가 아닌 '그'를 주인공으로 서술돼 있다. 정 추기경은 "가능한 한 내 주관을 떠나 객관적으로 쓰기 위해"라고 이유를 설명한다. 월간조선 등 언론 인터뷰에서 그가 밝힌 바에 따르면 정 추기경은 중공군 대공세가 있던 1950년 12월 국민방위군으로 입대해 경남 마산까지 도보로 피란했다가 기간사병에 지원하고, 이어 국민방위군 사관학교를 거쳐 장교로 미군 보급창에서 근무했다. 그는 국민방위군으로 서울에서 마산까지 피란 가던 시절에 아사(餓死)·동사(凍死) 그리고 지뢰를 밟아 숨져가는 동료를 눈앞에서 무수히 목격하면서 삶과 죽음의 문제를 깊이 묵상하고 1954년 가톨릭대 신학부로 진학하게 됐다고 한다.)

―그럼 9·28수복 후에 국군에 입대하신 것인가요?

"1·4후퇴 직전입니다. 그때 통역장교로 배치받은 곳이 요즘으로 치면 미군 기계화부대였어요. 미군이 공수해온 자동차, 탱크, 대포 등을 수리하는 부대였어요. 직접 총을 쏘지는 않았지만 전쟁 무기를 매일 다루면서 놀랐습니다. 제가 원래 발명가가 되고 싶었는데 이 모든 전쟁무기가 기막힌 발명품들이었어요. 자동차 베어링을 전차와 대포에도 그대로 끼워서 쓸 수 있었어요. 원래 개발될 때는 선용(善用)될 목적이었던 기계가 성능 좋은 살상무기로 쓰이는 거예요. 그 시절 미국의 쉰 주교님이 쓴 책을 읽게 됐어요. 그분은 이미 당시에 '원자탄을 성인(聖人)이 가지면 원자에너지, 원자력이 된다'고 적었어요. 그 말씀을 지금도 외우고 있어요. 그러면서 '사람의 마음이 문제구나'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전쟁상황에서 개인적인 고통을 겪고, 참상을 보게 되면 스스로도 잔인해지는 경우도 많습니다.

"복수 말씀이죠? 이스라엘 율법에 동태복수(同態復讐)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지요. 그렇지만 복수가 반복되면 인간성이 말살됩니다. 그러니까 '복수는 아니다'라고 생각했어요."

―6·25전쟁을 겪은 분들은 "'나와 6·25'가 전쟁을 모르는 젊은 세대에 좋은 교훈을 준 기사"라는 반응을 보내오십니다. 전쟁을 겪지 않은 세대에 한 말씀 해주신다면.

"평화는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평화를 지킬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라틴어 격언에 '시 비스 파쳄 파라 벨룸(Si vis pacem para bellum)' 즉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대비하라'는 역설적인 말이 있습니다. 이 격언은 적어도 정당방위의 능력이 있어야 의롭지 않은 공격을 예방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국가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을 지킬 능력이 없으면 자유와 평화를 빼앗깁니다. 우리의 역사가 잘 말해주고 있죠."

―오늘(지난 20일) 오전에 천안함 사건에 대한 조사결과 발표가 있었습니다. 북한의 공격으로 결론이 났습니다.

"불의한 공격에 대한 준비가 안 된 것입니다. 서해에 그런 공격이 있을 수 있다고 했다면 대비를 했을 것이고, 그런 비극이 없었을 것입니다. 철저한 대비가 있었다면 북이 그런 유혹을 받았겠습니까? 철저히 대비해야 합니다."

―추기경께서는 평양교구장 서리도 겸하고 있습니다. 현재 파주 통일동산에 '참회와 속죄의 성당'을 건축 중이시지요? 분단의 현장 바로 근처에 성당을 세우시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전쟁 범죄자는 소수이고 국민 전체가 피해자입니다. 그런데 피해자끼리도 전쟁의 극한 상황에서 본의 아니게 서로에게 옳지 않은 짓을 한 경우가 있어요. 그건 어느 전쟁터나 마찬가지입니다. 의도가 없이 상호 간 전쟁 중에 피해를 입힌 경우, 용서하고 참회하고 마음을 위로하고 상처를 치유하는 그런 장소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성당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 성당에 가서 실컷 울고 위로받을 수 있도록 말이지요. 참회와 속죄의 성당에서 판문점은 불과 10㎞ 거리입니다. 판문점이 전쟁과 분단의 상징이라면 참회와 속죄의 성당은 용서와 화해의 상징이 되었으면 합니다. 6·25전쟁을 겪은 분들과 후손들, 마음 아파하는 모든 이들을 하느님께서 위로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정진석 추기경은

1931년 서울의 독실한 천주교 신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서울 중앙고를 거쳐 서울대 화학공학과에 입학하던 1950년에 발발한 6·25를 겪으면서 인생진로를 바꿨다. 1954년 가톨릭대 신학부로 진학, 1961년 사제품을 받았다. 1968년부터 1970년까지 이탈리아 로마 우르바노대에 유학, 교회법으로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1970년 만 39세의 나이로 당시 한국 천주교 최연소 주교로 서품됐다. 28년간 청주교구장을 지냈으며, 1998년 고(故) 김수환 추기경의 뒤를 이어 서울대교구장에 임명됐고, 2006년 3월엔 교황 베네딕토 16세에 의해 한국인으로는 두 번째 추기경에 임명됐다. 평소 외부식사도 거의 하지 않고 업무에만 몰두하는 그의 취미는 독서와 저술. 전공분야인 교회법 해설서 15권을 비롯해 40여종의 저서와 역서를 내놓았다.

정진석 추기경이 명동성당 집무실에서 자신이 겪은 6.25와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있다. /정경열 기자 krchung@chosun.com
 
 

"선배님들, 가슴이 먹먹합니다… 경의를 표합니다"

 
"감동에 차 가슴이 먹먹해진다." "아침에 일어나 '나와 6·25'부터 본다."

본지 '나와 6·25' 사연이 지난 3월 7일부터 석 달 가까이 연재되는 동안 폭발적인 독자 반응이 이어졌다. 전화, 이메일, 인터넷 등을 통해 독자들은 하루에 수십건씩 사연을 읽은 소감을 특별취재팀에 전해왔다.

현역군인들과 초등학생이 사연의 주인공에게 전해달라며 손으로 쓴 편지를 보내왔으며, 해외(海外) 독자들은 "인터넷으로 매일 잘 읽고 있다"는 이메일을 보내왔다. "책으로 엮어 교육자료로 활용해달라" "영화로도 만들어달라"고 요청한 독자들도 적지 않았다. 기사로 소개된 미국·캐나다·영국·콜롬비아·필리핀·그리스 등 해외참전용사에 대해 따로 고마움을 표시한 독자들도 많았다. 또 사연의 주인공을 만나고 싶다는 요청이 쏟아지기도 했으며, 조선닷컴에도 '나와 6·25' 사연이 게재될 때마다 "감동하였다"는 댓글이 연이어 달렸다.

어머니에 대한 얘기를 하는 순간 흘러내린 눈물을 닦고 있는 방송인 송해씨.〈 5월 20일자 A8면〉/오진규 인턴기자
윤민상씨 "60년 전의 일이지만 척추에 박힌 적탄은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 살아있는 현실이네요. '어머니의 마지막 떡' 부분에서는 가슴이 멥니다. 부디 건강하십시오."(척추에 총알이 박혀 있는 이용만 전 재무부 장관 사연)

유윤동씨(영국 옥스퍼드대 박사과정) "제임스 그룬디 할아버지의 동료들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한국 사람으로서 감사의 편지를 제임스 할아버지에게 보내고자 한다."(영국군 참전용사 제임스 그룬디씨 사연)

조민씨 "요즘 말하는 수송부대, 공병부대네요. 선배님이 계시기에 우리 조국이 세계 강대국과 나란히 힘을 키우고 있습니다. 조국을 피로 지킨 우리의 선조들께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노무부대원 박승건씨 사연)

   ▲ 북한 포로수용소에서 탈출한 윤정식(왼쪽)씨가 손자와 이웃에게 옛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 3월 23일자 A8면〉 /양산=김용우 기자 yw-kim@chosun.com

오세윤씨(중국에서 주재원으로 근무중) "'나와 6·25'는 인터넷판으로 매일 접하고 있다. 전쟁을 경험하지 못했지만 아버지께서 1·4후퇴 때 황해도에서 피란을 오셔서 간접경험을 많이 했다. 많은 분들의 사연을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오기도 한다."

박용관씨 "매일 '나와 6·25' 사연을 모두 읽어야 직성이 풀린다. 계속 읽고 감격하며 스크랩하는 것이 유일한 일과이며 보람이다."

류영희씨 "결혼한 30대 자녀가 있는데 집에 인사 올 때마다 '나와 6·25'를 스크랩해 뒀다가 보여주고 있다."

고향에서 공산당 학살로 한꺼번에 온 가족을 잃은 김차순씨가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3월 15일자 A6면〉 /오진규 인턴기자
윤선희씨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와 기억으로 힘들어하는 김차순씨의 사연, 가슴이 저려옵니다. 누가 이분을 이렇게 만들었나요? 왜 이런 고통을 받아야 하나요?"(6·25 때 가족 7명이 몰살당한 김차순씨 사연)

방송인 송해씨 "지하철에서 만난 시민들이 '송 선생님한테 그런 애틋한 사연이 있는 줄 몰랐다'며 손을 꼭 잡아줘 감격스러웠다."

박일호씨 "우리의 현재의 번영이 우리의 손으로만 이룩한 걸로 아는데 저분처럼 자신과는 하등의 관계도 없는 한반도 땅의 자유를 수호하고자 죽음도 불사한 외국인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침부터 감동적인 기사를 읽고 나니 눈시울이 붉어진다. 감사합니다. 코트니씨!"(캐나다군 참전용사 빈스 코트니씨 사연)

본지의 주선으로 58년 만에 만난‘최초의 카투사’전우 류영봉(오른쪽)씨와 송백진씨.〈3월 16일자 A6면〉 /정경열 기자 krchung@chosun.com
김경순씨 "조국도 아닌 곳에서 희생한 당신의 사연을 읽는 동안 내내 가슴이 아파 눈물이 나네요."(영국군 참전용사 데릭 키니씨 사연)

한광섭 병장(52사단 정비근무대) "1·4 후퇴 때 낳은 아들을 폐렴으로 잃었다는 김은숙 할머니 사연을 분대원들에게 읽어줬더니 모두 숙연해졌다."

서울에 사는 한 독자 "베트남 참전용사입니다. '나와 6·25' 기획을 누가 했는지 모르지만 감사하다는 말 꼭 전해주세요."

재희·재은 엄마 "성남에 사는 37세 가정주부입니다. 생생한 체험을 바탕으로 한 기사 잘 보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와 안정은 결코 그냥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새삼 느낍니다."

중공군에 붙잡혔다가 기적적으로 살아 돌아온 그리스 참전용사 콘스탄티노스 흘레초스씨 부부.〈 5월 13일자 A8면〉 /흘레초스씨 제공
송영순씨 "아침에 신문을 보면서 평생 못했던 숙제 하나 마친 기분이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처형장에 끌려간 자신의 아버지 사연이 보도되자)

이성철 중위(해병대 1사단 2연대 정훈장교) "연대장께서 '나와 6·25' 기획이 정말 좋다며 매일 스크랩해서 교육자료로 활용하라고 하셨다."

양선화양(서울대방초등학교 6학년) "어려움 속에서도 미래를 설계하신 훌륭한 모습에 박수를 보냅니다."(전쟁고아였다가 대사관 직원이 된 문창수씨 사연)

영화배우 최은희씨 "내 사연이 나가고 전화가 많이 왔다. 누가 '당신이 영화배우일 뿐만 아니라 진정한 애국자'라고 해서 무척 기뻤다."

강규식씨 "신군식 선배님께 경의를 표합니다. 선배님 같은 분들 때문에 대한민국 국민들이 호의호식하며 이렇게 잘살고 있습니다."(인민군이었다가 국군 장교가 된 신군식씨 사연)
 

60년간 담아 두었던 사연 1500건 답지… 전화·방문도 수백명

'나와 6·25' 사연을 공모한다는 첫 사고(社告)가 2월 11일 나간 이래 지난 3개월간 우편 800여건, 이메일 720여건 등 모두 1500건이 넘는 사연이 답지했다. 우편·이메일 이외에도 "글솜씨가 없어 종이에 적지 못했다"면서 직접 본사를 찾아오거나 전화를 걸어오는 이들도 수백명에 달했다.

특별취재팀에는 자신이 보낸 사연이 제대로 접수됐는지, 언제쯤 보도될 수 있는지를 묻는 문의가 쉴 새 없이 이어졌다.

밤낮으로 쏟아지는 사연을 취재팀은 빠짐없이 꼼꼼하게 읽고 또 읽었다. 사연 하나하나, 문장 하나하나도 소홀히 할 수 없는 소중한 것들이었다. 취재팀은 접수된 사연을 정리하는 수준에서 그치지 않고, 전쟁에 얽힌 사연을 갖고 있는 독자들을 수소문하고 찾아다녔다. 외국인 참전용사나 방송인 송해씨 사연 등은 그렇게 발굴된 것이다.

사연을 보내온 분들은 "수십년간 마음에 담아 두었던 이야기"라며 조심스럽고 애절하게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그들의 사연은 한결같이 한 편의 영화나 소설에서나 접할 수 있을 것 같은 감동적이고 가슴 찡한 인생 스토리였다. 가족에게조차 한마디 안 했던 사연을 털어놓는 분들도 많았다. 특히 본사를 직접 찾아온 독자들은 한번 이야기를 시작하면 보통 4~5시간이 지나도 그칠 줄을 몰랐다. 격정적으로 이야기를 마친 독자들은 "이제야 가슴 속에 응어리졌던 무언가가 풀어지는 것 같다" "인생의 무게를 조금 던 것 같아 후련하다"며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돌아갔다.

강원도 원주에 사는 염병희(80)씨는 목발을 짚고 찾아왔다. 염씨는 "죽기 전에 소원이니 내 이야기를 꼭 써달라"고 했다. 6·25 당시 중대원 3분의 2가 희생된 중대장의 고뇌를 털어놓은 이공록(80)씨는 특별취재팀을 찾아왔다가 사연이 기사화됐고, 김광석(79)씨는 "좋은 기사를 실어줘 감사하다"며 스크랩한 '나와 6·25' 지면을 들고 찾아오기도 했다.

사연이 소개되면서 수십년 만에 소중한 사람을 재회하는 경우도 있었다. 간호사로 납북됐던 박명자(78)씨 탈출기가 보도되자 당시 함께 탈출했던 심경애(83)씨가 본사로 전화를 걸어왔고, 두 사람은 60년 만에 상봉했다. 또 누나를 잃은 조이성(70)씨 사연을 보고 누나의 연인이었던 A씨가 연락을 해와 양쪽이 만나기도 했다. 이외에도 사연이 소개된 주인공들과 수십년간 연락이 끊겼었다며 만날 수 있게 해달라는 전화가 쇄도했다.

주인공들의 안타까운 사연을 접하고 도와주겠다고 손을 내미는 사람도 많았다. 영국 참전용사 제임스 그룬디씨 얘기가 나가자 주방기구 회사 하츠는 "항공료와 숙박료를 대겠다"고 했고, 이해리씨는 "그룬디씨가 오면 UN기념공원 5분 거리의 아버지 아파트에 함께 지내도 된다"고 전해왔다. 하지만 그룬디씨는 "나보다 형편이 어려운 참전용사가 많다"며 정중히 사양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와 한국안보전략연구소는 일부 사연을 사료(史料)로 쓰겠다며 연락해왔고, 6·25전쟁 60주년 기념사업위원회는 홈페이지에 '나와 6·25' 사연을 게재했다.

 

 

"전 전쟁을 모르는 세대입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가 당신들과 함께 울어드리겠습니다"

  • 이현도(37·경기도 용인시)

 

        이현도(37·경기도 용인시)

30대 주부 이현도씨 '나와 6·25'를 읽고
신문 위로 눈물이 후드득 떨어져… 그런 끔찍한 일들이 이 땅에서 벌어졌다니…

저는 30대 중반의 일하는 여성이며 주부입니다. 최근 조선일보에서 창간 90주년 특집으로 내보내는 '나와 6·25' 기사를 보며 왜 그렇게 눈물이 나고 가슴이 아픈지요.

혈육을 잃은 분들의 사연을 읽으며 그게 바로 나와 내 가족일 수도 있었고 또 나와 내 가족이기도 하다는 생각에 사연이 적힌 신문 기사 위에 손을 올려놓고 다시는 이 나라에 이런 전쟁이 나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저는 전쟁을 모르는 세대입니다. 6·25전쟁의 참상이라곤 영화나 책에서 접한 게 전부입니다. 저에게 전쟁이란 다른 나라에서나 발생하는 참혹함이었습니다. 하지만 신문을 읽으면서 다른 어떤 나라의 전쟁보다 더 끔찍한 상황이 내가 일상을 누리는 이 땅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사연을 읽는 시간은 그동안 망각했던 진실을 깨닫는 시간이었습니다.

신문 속에서 이런 큰 감동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도 놀랐습니다. 그곳에 실린 분들의 이야기는 어떤 소설이나 드라마도 줄 수 없는 지고지순한 감동 그 자체였습니다.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순간에 딸을 와락 껴안은 뒤 등 떠밀려 기차에 탔던 아버지를 철없이 떠나보내야 했던 김희자씨의 사연, 형장으로 끌려가다 방금 면회 온 딸을 두리번거리며 찾던 아버지에게 차마 달려가지 못했노라는 13살 막내딸의 사연이 실린 신문 위로 후드득 눈물이 떨어졌습니다.

중공군 포로로 있을 때 당한 고문 후유증으로 오랫동안 고통의 시간을 보냈음에도 '한국은 제2의 조국'이라고 말하는 영국군 병사 데릭 키니씨의 말씀을 들으며 결코 이분들의 희생을 잊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주검으로 변했던 이 땅이 이렇게 다시 삶과 희망으로 충만한 곳으로 피어나기까지 피눈물을 머금은 분들의 거름이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라의 기둥이 된 저희 30~40대는 그동안 전혀 전쟁을 몰랐지만, 이번 기회를 통해 실제 생존자들의 이야기를 접하며 새로운 다짐을 하게 됩니다. 그분들은 수천번도 더 우셨겠지만 이렇게나마 함께 울어 드리고 새로운 다짐을 하는 세대가 늘어난다면 그리운 분들 다시 만나는 날엔 웃으실 수 있으시겠지요. 좋은 기획기사 실어주신 관계자분들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