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1년 1월 중순 전선은 일시 소강상태에 빠져 있었다. 불가사의한 것은 모든 전선에서 중공군이 홀연히 사라진 점이었다. 적이 언제 다시 공격할지 기다리는 유엔군은 초조했다. 중공군 공세에 밀려 37도선까지 후퇴한 유엔군은 부대의 사기도 크게 떨어져 있었다. 리지웨이 미8군사령관은 1개 연대 규모의 정찰부대를 편성해 중공군을 찾아나서기로 했다. 일명 ‘울프하운드’작전이었다. 임무는 미 제1군단 예하 제25사단의 제27연대가 맡았다. 연대장은 미군 전체 연대장 가운데 가장 젊은 미카엘리스 대령이었다.
1월 15일 아침 27연대는 항공기 엄호를 받으며 1번 도로를 따라 수원 방향으로 조심스럽게 진격했다. 하지만 평택지역을 떠나 오산에 이를 때까지 적의 그림자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다 16일 오전 수원에 진입하면서부터 중공군의 강력한 저항을 받기 시작했다.
- ▲ 낙동강을 건너 진격하는 미 제3사단
이 부대의 오른쪽을 엄호하기 위해 출동한 다른 부대도 초기에는 적의 저항을 전혀 받지 않다가 수원에 근접하면서 600~ 800명의 중공군 저항을 받았다. 이 작전을 통해 연합군은 중공군이 예상보다 북쪽인 수원·이천까지밖에 진출하지 못했고, 화력 지원과 보급 수준이 매우 열악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감을 얻은 리지웨이 장군은 좀 더 대규모의 강력한 수색작전을 벌이기로 했다. 이 작전은 중공군이 개입한 이후 처음으로 개시된 유엔군의 반격으로 ‘선더볼트’작전이라고 불렸다.
1월 25일 미군 2개 사단이 북진을 시작했다. 유엔군은 서울까지 5개의 가상의 통제선을 설정하고 오산과 여주 두 방향에서 한 단계씩 차근차근 점령해 나간다는 계획을 세웠다. 적의 저항은 오산과 수원·이천 등에서 완강했지만 예상보다는 경미한 수준이었다. 리지웨이 장군은 적의 저항 수준이 미약하다고 확신했다. 드디어 1월 31일 그는 미 제1군단과 제9군단에 “주력을 투입하여 본격적인 공세로 전환하라”고 명령했다.
이처럼 서부전선의 전황이 급격히 좋아지자 리지웨이 장군은 중동부지역의 전선도 북상시킬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이 지역에서는 주된 공격 임무를 국군이 맡았다. 중공군과 북한군이 집결해 있는 홍천을 포위 공격한다는 계획이 마련됐다. 작전 명칭은 ‘적의 주력을 몰아서 섬멸한다’는 뜻에서 ‘라운드업’작전이라고 불렸다. 이러한 반격으로 아군은 2월 10일쯤 서부전선에서 한강선까지 진출했고, 서울을 바라볼 수 있게 됐다. 또 동부전선에서는 국군 제1군단이 2월 7일에 대관령~강릉을 잇는 선까지 진출했다.
아군이 본격적인 반격작전에 나서게 된 배경에는 중공군의 보급 상태에 대한 판단이 결정적 힘이 됐다. 리지웨이 장군은 중공군 1·2·3차 공세를 분석했다. 결론은 중공군 공세가 8일간 지속된 뒤 1개월 동안 중단된다는 것이었다. 이는 전투병이 휴대할 수 있는 보급품이 1주일 정도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중공군 보급 능력이 형편없이 낙후됐고, 유엔 공군의 후방 폭격으로 전투 중에 재보급을 받지 못했던 것이다. 베일에 가려졌던 중공군 약점이 확인된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