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백우기(73·경기도 화성)
백우기씨 '형제는 용감했다'
머슴살이 하다 큰형은 포병 둘째형은 수색대대로 참전
쏘라면 쏘고, 쉬라면 쉬고… 시키는대로 잘했던 형들 큰 부상 없이 집에 돌아와
광복 이듬해 아버지가 호열자(콜레라)로 돌아가시자 생계는 어머니와 세 형님들이 짊어졌다. 세 형님은 국민학교도 못 다녔다. 남의 집 머슴살이하고 산에서 나무를 해 팔아 가계를 꾸렸다.전쟁 나고 얼마 안 돼 형들은 국군이 됐다. 1950년 7월, 큰형(당시 25세)이 군에 징집됐다. 집안 기둥인 큰형의 입대는 우리 가족에게 큰 충격이었지만 큰형은 담담했다. "전쟁이 벌어졌으니까 가야지"라고 했다. 형님은 그렇게 보리밥 한 그릇을 먹고 훌쩍 떠났다. 두 달 뒤엔 둘째형(당시 20세)이 군에 불려갔다. "오라니까, 국가와 민족을 위해 다녀오겠다"고 했다. 큰형은 포병으로, 둘째형은 수색대대로 중부전선에 불려갔다. 돈 없고 무식한 사람은 죄다 군대에 간다던 시절, 형들은 군소리없이 전방으로 향했다.
형들은 시키는 대로 잘했다. 글도 못 쓰고 상황 파악도 잘 못해 남들이 총을 쏘면 따라 쏘고 남들이 밥 먹으면 따라 먹었다. 전우를 구하라면 구했고 '돌격 앞으로'가 울려 퍼지면 돌격했다. 그리고 도망가지 말라면 도망가지 않았다. 무용담도 우직했다. 큰형은 언젠가 "내가 포를 쏴서 인민군을 사살해도 50명은 사살했을 거다"라고 했다. 둘째형은 "수색 나가서 인민군들하고 총질할 때 그것들이 죽었으니까 내가 살아나온 거다"라고 했다. 형님들의 군대이야기는 그렇게 솔직했다. 전쟁이 치열해지자 다친 동료를 업고 오다 죽은 사람이 많아졌다. 사람들이 겁을 먹고 쓰러진 동료 구하기를 꺼려도 형님들은 "동료를 못 버리겠더라"며 끝끝내 다친 동료를 업고 나왔다고 했다. 희망도 소박했다. "밥 많이 먹고 잘 잤으면 좋겠다"는 게 전부였다.
그런 우직함 덕분인지 두 형은 큰 부상도 안 당했다. 누구는 포로로 끌려가고, 누구는 총에 맞아 죽는데 큰형은 후퇴 도중 허벅지를, 둘째형은 목부분을 다치는 데 그쳤다. 전쟁통에 면사무소 급사일을 했던 나는 가끔 형님들 이름으로 된 편지가 전방에서 날아올 때마다 가슴이 철렁했다. 동네의 다른 징집자들 전사통지서를 여러 번 받아봤기 때문이다. 다행히 편지에는 형들이 군복무를 잘하고 있다는 부대장 편지가 들어있었다.
전쟁에서 두 형 모두 무사히 돌아온 것은 기적이었다. 동네 장정 17명이 끌려갔는데 살아온 건 5명뿐이었고, 그중에 둘이 우리형이었다. 동네 사람들이 "조상을 잘 모셨는가"라고 부러워했지만 형들은 그런 말에 별로 우쭐해 하지도 않았다. 집안에 보탬이 되려고 제대 후 바로 1년에 쌀 한 가마니 주는 머슴살이를 했다.
형들이 제대하고 정전이 된 이듬해 셋째형도 군에 갔다. 공병으로 지뢰제거와 다리건설 등을 맡았던 셋째형도 군에 가는 것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형님들은 이미 모두 세상을 떠났지만 나는 그런 형들의 용기와 소박함이 우리나라를 구한 게 아닐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