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6.25전쟁60주년

의사였던 큰아버지 변호사였던 아버지 北보위부에 함께 납북

namsarang 2010. 5. 19. 22:53

[나와 6·25]

의사였던 큰아버지 변호사였던 아버지 北보위부에 함께 납북

  • 백낙환 인제대·백병원 이사장 (88·서울 종로구)

       〈특별취재팀〉

 

          백낙환 인제대·백병원
         이사장 (84·서울 종로구)

 [39] 백낙환 인제대·백병원 이사장의 '병원 재건'

 

나는 1939년 서울 휘문중학교(5년제)에 입학하면서부터 쭉 큰아버지(백인제) 집에서 생활했다. 어머니는 첫째였던 나를 낳은 지 6개월 만에 폐렴으로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곧바로 일본 유학을 다녀온 뒤, 귀국하자마자 재혼했다. 고향인 평북 정주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조부모님 밑에서 자랐고, 중학교 진학과 더불어 큰아버지 댁으로 옮긴 것이다. 내겐 큰아버지가 아버지나 마찬가지였다.

큰아버지는 도쿄제국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고 경성의전 교수를 지낸 명망있는 외과 의사였다. 1941년부터 서울 저동에서 백인제외과를 운영하셨다. 나는 공대로 진학하려 했지만 큰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1944년 경성제국대학 의예과에 입학했다.

백외과 원장인 큰아버지와 변호사 아버지가 한꺼번에 납북돼

1950년 9월 서울대 의대를 졸업할 예정이었지만 갑자기 전쟁의 포성이 울리면서 모든 게 빗나갔다. 큰아버지는 "죄지은 게 없는데 왜 도망가냐. 의사가 환자를 두고 어딜 간다는 말이냐"고 했다. 70병상 규모 병원엔 국군 부상병과 총상을 입은 민간인들이 순식간에 밀려들었다.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전쟁 개시 4~5일 후에는 북한군이 백병원을 접수했다.

그제야 큰아버지는 흥사단 단원인 박현환씨 집으로 피신했다. 하지만 북한군 보위대가 큰아버지를 찾아냈다. 목격자들에 따르면, 큰아버지는 반항을 못하고 순순히 따라갔다고 한다. 보위대는 당시 변호사이던 아버지도 찾아내 참고인으로 조사하겠다며 데려갔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北 야전병원 끌려가다 탈출

인민군 세상에서 먹고살 길이 막막했다. 용돈을 밑천으로 경기도 인근의 농촌에 가서 쌀을 구한 후, 서울에서 내다 팔며 생계를 유지했다. 9월 초, 쌀자루를 메고 골목을 걷는데 인민군이 날 불렀다. 그는 내가 서울대 의대 졸업반이라고 하자 "유능한 인재로군. 인민군에 자발적으로 지원하시오"라고 했다. 그렇게 불심검문에 걸려 노상에서 징집됐다.

나는 안동야전병원으로 가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들은 주먹밥 몇 덩이를 쥐어주며 전선으로 끌고 갔다. 탈출하다 발각되면 목숨을 부지할 수 없는 '죽음의 행진'이었다. 보름쯤 지나 안동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부터 전세가 국군에 유리하게 뒤집어졌다. 인민군은 방향을 돌려 북으로 끌고 가기 시작했다. 영주, 제천을 거쳐 강원도 원주에서 미군 B29기의 집중폭격을 받았을 때 필사의 힘으로 탈출했다. 이가 들끓는 몸으로 양평을 거쳐 서울로 돌아왔다.

죽음의 행진에 끌려가다 탈출해 큰아버지 병원 다시 일으켜

큰아버지와 아버지는 여전히 행방불명이었다. 인민군이 9·28 수복 직전 북한에 끌고 갔다는 소식만 이곳저곳에서 들려왔다. 어른이 없는 집안은 텅 비었고, 병원도 제대로 운영되지 않았다. 이듬해 1·4 후퇴 때 나는 큰아버지네와 새어머니 및 이복동생들과 함께 대구로 피란 갔다. 다시 혼자 부산에 내려가 1951년 9월 부산에 임시로 가설된 서울대에서 졸업장을 받았다. 나는 졸업과 동시에 자원해서 군의관이 됐다. 포항군산의 후방 보충부대에서 대략 10만명 정도의 신병 신체검사를 맡았다. 하지만 반년 만에 결핵에 걸려 병상에 6개월간 누워 있었다.

다 쓰러진 큰아버지 병원 재건

1952년 9월 의병(依病)제대하고 서울에 돌아와 보니, 백외과병원은 거의 형체만 남아 병원이라 하기에도 민망했다. 큰아버지 제자들과 함께 병원에서 먹고 자며 재건에 힘썼다. 평생 좋은 병원을 세워야 한다는 큰아버지의 과업(課業)을 이루려 애썼다. 1972년 서울백병원이 종합병원으로 개원했고, 1979년에는 큰아버지의 이름을 따 인제의과대학(현 인제대)을 설립했다.

큰아버지·아버지 소식은 지난 2000년 6월 내가 남북정상회담 특별수행원으로 평양에 갈 때 통일부로부터 들을 수 있었다. 큰아버지는 정치범으로 수용돼 있다가 1955년 남로당 박헌영과 함께 숙청됐고, 아버지는 함경도 집단농장에 끌려가서 일하다 돌아가셨다고 했다. 큰아버지께 "부끄럽지 않으려 노력했습니다"라는 한마디를 들려드리고 싶다.

 

 총알도 피해간, 우직했던 우리 형들

  • 백우기(73·경기도 화성)

 

백우기(73·경기도 화성)

백우기씨 '형제는 용감했다'
머슴살이 하다 큰형은 포병 둘째형은 수색대대로 참전
쏘라면 쏘고, 쉬라면 쉬고… 시키는대로 잘했던 형들 큰 부상 없이 집에 돌아와

광복 이듬해 아버지가 호열자(콜레라)로 돌아가시자 생계는 어머니와 세 형님들이 짊어졌다. 세 형님은 국민학교도 못 다녔다. 남의 집 머슴살이하고 산에서 나무를 해 팔아 가계를 꾸렸다.

전쟁 나고 얼마 안 돼 형들은 국군이 됐다. 1950년 7월, 큰형(당시 25세)이 군에 징집됐다. 집안 기둥인 큰형의 입대는 우리 가족에게 큰 충격이었지만 큰형은 담담했다. "전쟁이 벌어졌으니까 가야지"라고 했다. 형님은 그렇게 보리밥 한 그릇을 먹고 훌쩍 떠났다. 두 달 뒤엔 둘째형(당시 20세)이 군에 불려갔다. "오라니까, 국가와 민족을 위해 다녀오겠다"고 했다. 큰형은 포병으로, 둘째형은 수색대대로 중부전선에 불려갔다. 돈 없고 무식한 사람은 죄다 군대에 간다던 시절, 형들은 군소리없이 전방으로 향했다.

형들은 시키는 대로 잘했다. 글도 못 쓰고 상황 파악도 잘 못해 남들이 총을 쏘면 따라 쏘고 남들이 밥 먹으면 따라 먹었다. 전우를 구하라면 구했고 '돌격 앞으로'가 울려 퍼지면 돌격했다. 그리고 도망가지 말라면 도망가지 않았다. 무용담도 우직했다. 큰형은 언젠가 "내가 포를 쏴서 인민군을 사살해도 50명은 사살했을 거다"라고 했다. 둘째형은 "수색 나가서 인민군들하고 총질할 때 그것들이 죽었으니까 내가 살아나온 거다"라고 했다. 형님들의 군대이야기는 그렇게 솔직했다. 전쟁이 치열해지자 다친 동료를 업고 오다 죽은 사람이 많아졌다. 사람들이 겁을 먹고 쓰러진 동료 구하기를 꺼려도 형님들은 "동료를 못 버리겠더라"며 끝끝내 다친 동료를 업고 나왔다고 했다. 희망도 소박했다. "밥 많이 먹고 잘 잤으면 좋겠다"는 게 전부였다.

그런 우직함 덕분인지 두 형은 큰 부상도 안 당했다. 누구는 포로로 끌려가고, 누구는 총에 맞아 죽는데 큰형은 후퇴 도중 허벅지를, 둘째형은 목부분을 다치는 데 그쳤다. 전쟁통에 면사무소 급사일을 했던 나는 가끔 형님들 이름으로 된 편지가 전방에서 날아올 때마다 가슴이 철렁했다. 동네의 다른 징집자들 전사통지서를 여러 번 받아봤기 때문이다. 다행히 편지에는 형들이 군복무를 잘하고 있다는 부대장 편지가 들어있었다.

전쟁에서 두 형 모두 무사히 돌아온 것은 기적이었다. 동네 장정 17명이 끌려갔는데 살아온 건 5명뿐이었고, 그중에 둘이 우리형이었다. 동네 사람들이 "조상을 잘 모셨는가"라고 부러워했지만 형들은 그런 말에 별로 우쭐해 하지도 않았다. 집안에 보탬이 되려고 제대 후 바로 1년에 쌀 한 가마니 주는 머슴살이를 했다.

형들이 제대하고 정전이 된 이듬해 셋째형도 군에 갔다. 공병으로 지뢰제거와 다리건설 등을 맡았던 셋째형도 군에 가는 것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형님들은 이미 모두 세상을 떠났지만 나는 그런 형들의 용기와 소박함이 우리나라를 구한 게 아닐까 생각한다.
 

[미니 戰史]

[19] 소련 공군 MIG-15 참전

  • 이근석 군사편찬연구소 연구원
중공 전투기로 위장해 청천강~압록강 지역만 출격…
美전투기와 공중전 벌이며 아군이 장악한 제공권 흔들어
지상공격은 안해
중공 지상군이 한반도에 진입할 무렵, 전쟁의 또 다른 변수로 등장한 것은 소련 전투기의 출현이다. 소련 전투기들은 중공 국적표지를, 그리고 조종사들은 중공 공군복을 입는 등 중공전투기로 위장했다.

1950년 11월 1일 중공 선양과 안산 비행장에서 이륙한 소련 공군 제151비행사단 소속 MIG-15기 16대가 미 공군 T-6 전술통제기와 F-51 전투기를 공격했다. 또 11월 8일에는 안둥(현재 단둥)기지에서 발진한 MIG-15기와 미군 F-80전투기 간 공중전이 벌어졌다. 이때 미 브라운 중위가 MIG-15 1대를 격추시켰는데 이는 사상 처음으로 이루어진 제트 전투기 간 공중전이자 미군이 제트기 간 교전에서 거둔 최초의 승리이기도 했다. 이후 정전 때까지 소련은 14개 전투비행사단 2만6000명의 병력을 중공에 주둔시켰고, 총 6만3229회 출격해 1790여회의 공중전을 벌였다.

소련 공군의 등장으로 전쟁은 이전과는 다른 양상으로 진행됐다. 한국전 발발 이틀 후인 1950년 6월 27일 지상군보다 먼저 참전한 미 공군은 7월 이후 한반도 전역에 대한 완전한 제공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뛰어난 성능과 무장을 갖춘 최신예 MIG-15 전투기 참전에 따라 유엔 공군은 이 전투기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당시 유엔 공군의 주력 전투기인 F-80과 F-51은 적 MIG-15 전투기를 만나면 공중전을 회피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고, 아무런 방해 없이 적진을 초토화했던 B-29와 B-26폭격기는 전투기 엄호 없이 임무를 수행할 수 없었다. 그리고 국군과 유엔 지상군은 이전과는 달리 적 공습에 직접 노출되기도 했다. 결국 소련공군의 참전은 1950년 11~12월의 아군 후퇴를 가속화시키는 한 요인이 되었다.

소련공군의 역할은 한반도 진입 초기 단계에서 중공군을 유엔군 전투기들로부터 보호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국군과 유엔군 지상군을 공격하거나 한반도 중부 이남까지 진출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주로 청천강 이북~압록강 이남지역인 소위 '미그회랑'에서 유엔 전투기와 치열한 공중전을 벌였고 방공요격 임무에 치중했다. 당시 미국은 소련공군의 철저한 위장으로 인해 중공 공군으로 인식했고 이러한 인식은 이후 상당기간 지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