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필리핀 '복수 부대' 피카체씨
7월27일 낮 80차례 이상 교전 5배 많은 총알·박격포 쏴
밤 10시쯤 천지 조용해졌지만 적 응시하며 뜬눈으로 밤 새워
그 날 그 고지서 맞은 휴전이 60년이나 지속될줄 아무도 몰라
나는 1951년 필리핀통합사관학교를 졸업한 직업 군인이었다. 이듬해 가을 사마르 지역에서 필리핀 공산반군 토벌 작전을 수행하던 어느 날, 한국 파병부대 지원서를 썼다.
한국을 침범한 공산군을 치면 필리핀 공산 반군도 위축될 것이고, 직업 군인으로서 최신 전술을 경험하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마닐라타임스의 베니그노 아키노(신임 노이노이 아키노 대통령 당선자의 부친, 1983년 피살) 기자 등
서울의 종군 기자들이 전해오는 뉴스는 어두운 소식뿐이었다. 첫 파병부대인 제10전투단 1394명 중 43명은 시신으로, 145명은 부상병으로 돌아왔고 48명이 전투 중 실종됐다고 했다. 뒤이어 파병된 제20전투단과 제19전투단도 큰 피해를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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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길레르모 피카체(84·필리핀 마닐라)
이 때문에 우리 부대(제14전투단)는 '복수부대(Avengers)'로 불렸다. 앞서 파병된 전우들이 당한 피해를 열배, 백배로 보복해 주자는 뜻이었다. 우린 1년 가까이 한국 산악지형과 비슷한 '마리키나 캠프'에서 훈련을 받았는데, 아군 피해소식이 전해질 때마다 훈련은 더욱 지독해졌다.
1953년 3월 16일, 우리 부대 1656명은 수송함 2척에 나눠 타고 나흘 만에 부산항에 도착했다. 미 45보병 사단에 배속돼 두 달간 현지 적응 훈련을 받은 뒤 5월 15일
강원도 양구군 사태리 계곡에 내렸다. 우리 임무는 '단장의 능선'과 이어지는 '크리스마스 고지'를 지키는 일이었다. 첫 전사자는 5월 27일에 나왔다. C중대 초병이 순찰을 나갔다가 중공군 매복에 걸려 전사했다.
폭우가 쏟아지던 7월 17일 밤 우리 중대는 크리스마스 고지 관측소로 이동했다. 본부에서 관측소까지 직선 거리는 450m 정도인데 이동하는 데 4시간이 넘게 걸렸다. 길은 꾸불꾸불하고 미끄러워 한 발짝 헛디디면 60~70m 낭떠러지 아래로의 추락을 의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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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25전쟁에 참전했던 필리핀 군인들이 참호 속에서 식사를 하는 모습. 사진 맨 오른쪽 뒷모습을 보이는 사람이 피카체씨. /피카체씨 제공
보급도 문제였다. 우리가 그곳에 배치된 다음 날, 한국군 보급부대가 식량과 탄약을 갖고 올라오다 적 폭격으로 10명이 사망했다. 그 바람에 우린 며칠을 굶고 싸워야 했다. 중대장은 "적이 10야드(9m)까지 접근할 때까지, 적군의 눈 흰자를 볼 때까지 쏘지 말라"고 지시했지만, 대개는 적이 30야드 정도 접근해오면 사격이 시작돼 수류탄과 자동 소총을 퍼부었다. 첫날밤 9시부터 다음날 새벽 5시까지 중공군은 끝도 없이 파도처럼 기어올라왔다. 매일 매일 숨 돌릴 틈 없는 전투가 벌어졌다. 중공군은 죽여도 죽여도 기어올라왔다. 말로만 듣던 '인해전술'은 기가 질릴 정도였다. 우린 잠을 못 자 눈이 벌겋게 충혈됐고 수염도 못 깎아 얼굴이 원숭이처럼 변해갔다.
중공군은 전투가 뜸한 낮 시간대에 필리핀계(系) 군인들을 접근시켜 타갈로그어(필리핀 방언)로 "필리핀인은 집으로 가라"고 고래고래 소리지르기도 했다. 그때마다 우린 박격포 세례를 퍼부었다.
7월 27일 아침 사단본부로부터 "휴전이 임박했으나 적이 이상을 보이면 모든 폭약을 사용해 보복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날 낮 80차례 이상 교전이 벌어졌다. 우린 명령대로 5배씩 더 많은 총알과 박격포를 쏴 댔다. 오후 6시 50분 "휴전 협정이 체결됐으니 밤 9시 45분 이후엔 일체의 사격을 중지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순진한 일부 병사들은 9시 45분 직후 일제히 참호 밖으로 나가 만세를 부르며 "잘 가라,
중국 놈들"이라고 소리쳤다. 하지만 하마터면 그때 다 죽을 뻔했다. 적은 곡사포와 박격포 수천 발을 우리 쪽에 쏘아댔다. 우린 참호에 다시 뛰어가 고지 아래로 남은 폭약을 다 퍼붓고 기관총을 난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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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3년 휴전 직후 필리핀 파병부대의 서울 연락관으로 근무하던 피카체(뒷줄 왼쪽에서 네번째)씨가 동료들과 찍은 사진. /피카체씨 제공
그 직후인 밤 10시, 온 천지가 조용해졌다. 발포는 멈췄지만 우린 쉴 수가 없었다. 적은 언제든 휴전 협정을 위반할 수 있었기 때문에 우린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다시 해가 떴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날 크리스마스 고지에서 맞은 휴전이 60년이나 지속될 줄 아무도 몰랐다.
얼마 후부터 나는
필리핀 파병부대 연락관으로 판문점과 미8군을 드나들었고, 그때 많은 한국군 친구들도 사귈 수 있었다. 한국전 참전은 개인적으론 행운이었다. 귀국할 때 가져온 1200달러로 마닐라 변두리 땅 여러 곳을 샀는데 어떤 땅은 500배, 다른 땅은 5000배나 오르기도 했다. 귀국 후 변호사 시험에도 합격하고 별(준장)도 달았다. 예편 후에도 필리핀성우회(AGFO) 회장을 2차례 역임했고, 15년간 외국계 회사의 CEO도 해 봤다.
다음 달 7~11일 자유총연맹 초청으로 한국 친구들을 만나러 간다. 7번째 한국 방문이다. 갈 때마다 발전하는 한국 모습에 보람도 느끼고 부럽기도 하다. 한편으론 한국 친구들이 하나 둘 저세상으로 갔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가슴이 무척 아리다. 한국 방문 때마다 비자 받기가 너무 까다로워 "참전용사에 대한 대접이 이런 것이냐"고 묻고 싶을 때도 있다.
아버지 死地로 간 날 나는 석방되고… 인민군이 갈라놓은 엇갈린 父子의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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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원목(78·서울시 강서구)
1950년 7월 3일 밤, 우리 집에 총을 든 북한 보위부 3명이 갑자기 들이닥쳤다. 그들은 잠자고 있던 내 목에 대검을 들이대며
농협의 전신인 금융조합 이사이면서 마을 구장 일을 하시던 아버지를 당장 내놓으라고 협박했다.
아버지는 전날 구장 회의 때 친하게 지냈던 의사 박종하씨로부터 "
북한 놈들이 당신을 잡으러 간다고 하더라. 빨리 피해라"는 얘기를 듣고 이미 집을 나간 상태였다.
그들은 집안을 샅샅이 뒤져도 아버지를 찾을 수 없자 나와 박씨를 함께 내무서로 끌고 갔다. 그리곤 야구방망이 같은 둔기로 내 머리와 목을 사정없이 두들겨팼다. 하지만 나는 아버지 행적을 말하지 않았다. 우리는 인민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한 부잣집 김치광에 갇혔다. 어느 날 새벽 보위부 직원이 날 불렀다. '이제 죽는구나' 했는데 예상은 빗나갔다. "나이가 어려 석방하니 인민을 위해 열심히 일하라"고 했다. 문이 열리자 나는 정신없이 달렸다. 뒤통수에 총을 쏴 죽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날 아버지와 내 운명은 엇갈렸다. 아버지는 "아들이 죽는데 살아 뭐하냐"며 스스로 내무서를 찾아갔다고 한다. 형과 누나가 병으로 죽어 남은 자식은 나뿐이었다. 그 이후 패물과 돈 몇푼을 들고 수원내무서로 찾아갔지만, "반동 부르주아인 네 아비는 면회도 안 된다"며 쫓겨나야 했다.
얼마 후 아버지가
수원·
용인 인근에서 총살당했다는 말을 듣고 찾아가 시쳇더미를 뒤졌지만 허사였다.
[미니 戰史]
1950년 10월 15일에도 맥아더는 트루먼에게 "中개입 가능성 적다" 말해
김일성은 서울 탈환되자 毛澤東에게 파병 요청
1950년 10월 15일, 태평양에 있는 절해의 고도 웨이크 섬. 오전 7시 36분부터 시작된 회의에서 중공·소련의 개입가능성을 묻는 트루먼 대통령의 질문에 맥아더 원수는 "아주 적다"고 잘라 말했다. 만일 중공군이 밀고 내려올 경우 "전례 없는 대학살이 그들을 기다릴 것"이라고도 했다.
그 무렵 한반도에서는 10월 11일 밤부터 압록강을 넘은 중공군 선발대가
북한 집결지에서 위장을 끝내고 있었다. 이어 19일부터 본격화된 중공군의 북한전개는 전쟁 후반부엔 최고 17개 군단 120만명에 달할 때도 있었다.
첫 도강은 압록강 중·하류의 장전하구, 집안, 안동(현 단둥) 등에서 이뤄졌으며, 중공군은 매일 어둠이 깔릴 때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강을 넘은 뒤 철저히 은닉했다. 일부 병력은 긴급히 제조한 북한군 군복과 군장을 착용하고 들어왔다.
제1차로 북한에 진입한 병력은 4개 군단(제38·제39·제40·제42군단), 3개 포병사단과 여타 공병 등 25만여명이었는데, 그들은 22일까지 희천-구성-운산-덕천선 이북지역에 배치를 완료하고 아군의 접근을 기다렸다.
또 10월 23일부터 기동을 개시한 제50군단과 제66군단이 10월 25일~11월 6일 사이에 들어와 병력은 총 6개 군단 18개 보병사단과 3개 포병사단 약 29만명으로 늘어났다. 중공군총사령관은 52세의 백전노장 팽덕회였다.
김일성은 국군과 유엔군의
서울탈환이 임박했을 때까지도 중공의 파병을 강하게 반대했다.
9월 21일 소집된 북한노동당 중앙위원회에서 박헌영·김두봉·박일우 등 당내 지도적 인물들이 찬성한 것과 달리 그는 중공에 군사지원을 요청하길 거부했다.
중공군이 한반도에 발을 붙이면 중공이 육성한 연안파들이 득세할 수 있는 배경이 될 것이고, 그것은 곧 김일성 자신과 그의 추종자들의 정치적 입지가 줄어들 수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울이 탈환되자 결국 그는 중공의 파병을 요청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찍부터 미군을 "종이호랑이"로 여긴 모택동은 대규모 초전 기습으로 미군에 타격을 입히면 전쟁의 주도권 확보가 가능하다고 봤고, 미군의 현대 무기 장비에 대해선 엄청난 수의 병력과 인간의 정신력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