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6.25전쟁60주년

北선전극 공연하다 국군 위문공연 영화보다 더 영화같았던 내 인생

namsarang 2010. 5. 10. 22:36

[나와 6·25]

北선전극 공연하다 국군 위문공연 영화보다 더 영화같았던 내 인생

  • 최은희 (영화배우·84·서울 서초구)

     〈특별취재팀〉

 

 [34] 두번 납북된 영화배우 최은희

김동원·김승호·오현명과 함께 北 경비대 협주단에 소속
발톱까지 빠졌던 고된 납북길… 유엔군 폭격 틈타 겨우 탈출
국군 만나 戰場 돌며 위문공연… 헌병대장이 총 겨누며 덮치기도
78년 다시 납북·탈출·망명… 또 한번 운명의 소용돌이에

최은희 (영화배우·84·서울 서초구)
1950년 6월 25일. 나는 전남 목포에서 영화 '사나이의 길'을 찍고 있었다. 촬영장에 급보(急報)가 날아들었다. 인민군이 의정부까지 내려왔고, 곧 서울을 삼킬 기세라는 것이다. 그때 내 나이 스물넷. 영화계 데뷔 4년째를 맞아 떠오르는 스타로 자리매김을 하던 시절이었다. 촬영장은 술렁거렸고, 제작진과 배우 대부분은 부산으로 피란을 떠났다. 나는 서울에 있는 친정식구와 남편(김학성)이 걱정됐다. 혼자 기차를 타고 올라와 6월 27일 서울역에 도착했다. 당시 남편이 결핵으로 앓고 있어 그대로 서울 남산동 집에 머물렀다.


인민군에 끌려가 북한 선전연극하게 돼

7월 어느날, 쌀 한 톨 없어 시계를 팔아 먹을 것을 마련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혼자 남산동 언덕길을 내려오고 있었다. 갑자기 등 뒤에서 인민군 장교복장의 남자가 내 어깨를 덥석 잡았다. "동무, 최은희 동무가 아니요. 나 심영이오." 일제 때 유명배우였던 심영은 해방 후 월북했다고만 알고 있었다. 한번도 만난 적이 없었지만 영화를 통해 나를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1947년 영화 데뷔작‘새로운 맹세’에 출연할 당시의 최은희씨 모습.
심영은 날카로운 눈매로 쏘아보더니 따라오라고 했다. 나는 북한 내무성 소속 경비대 협주단에 소속됐다. 북한이 예술인들을 선전도구로 이용하는 조직이었다. 명동성당에 가보니 배우 김동원·김승호·주증녀, 지휘자 임원식, 성악가 오현명 등 200명이 넘는 예술인이 끌려와 있었다. 우리는 성당 수녀 기숙사에서 합숙하며 공산당을 찬양하는 연극과 선무공작을 연습했다. 밤에는 북한영화를 보면서 사상교육을 받았다. 인민군은 종교는 아편이라며 성서를 명동성당 마당에 쌓아놓고 불태우기도 했다. 또 걸핏하면 "사상이 틀려먹었소"라며 자아비판을 시켰다.

9·28 수복을 앞두고 인민군은 우리를 북으로 끌고 갔다. 걸어서 춘천 방향으로 떠난 지 며칠 지나지 않아 배우 김승호씨가 배가 아프다며 감쪽같이 연기를 해서 어디론가 사라졌다. 춘천에서는 오현명씨가 탈출했다. 인민군은 "그 반동 간나새끼들 잡히면 죽는 줄 알아. 너희들도 도망가다 잡히면 바로 총살이야"라고 겁을 줬다. 납북길은 고된 여정이었다. 발이 부르트고 발톱이 빠졌다. 지금도 나는 양쪽 엄지발톱이 제대로 자라지 않는다.

10월 어느날 평남 순천군까지 갔을 때였다. 유엔군 낙하산이 수십개 내려오더니 우리 쪽을 맹폭했다. 순식간에 대열이 무너졌다. 난 그 틈을 노려 탈출했다. 재즈연주자 엄토미(엄앵란씨 삼촌)씨 등 6명의 남자 음악인들과 한 무리가 돼 도망갔다. 강을 건널 때는 그분들이 수영을 못하는 내 어깨를 잡고 헤엄쳐 건너고, 인민군 패잔병들에게 쫓기는 등 탈출 과정도 험난했다.

1953년 최은희(오른쪽)씨와 신상옥 감독의 모습. 두 사람은 이듬해 결혼했다.

납북되다 탈출한 이후 국군 정훈공작대에서 위문공연 다녀

평남 성천군에 왔을 때 6사단 소속 국군 트럭 행렬을 만났다. 우리는 "대한민국 만세, 국군 만세"를 불렀다. 나는 '이제 살았다'는 생각에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성천 읍내에서 조 대위라는 정훈장교를 만났는데, 나를 알아보더니 "정훈공작대에서 선무활동을 해달라"고 했다. 정훈공작대는 전장(戰場)에서 목숨을 걸고 위문 공연을 한다고 해서 '군번 없는 용사'로 불렸다. 하루빨리 서울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북한 경비대 협주단에 협력했던 전력(前歷) 때문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얼마전까지 인민군 쪽에서 선전 연극을 하다가, 이젠 국군 편에서 선무 활동을 해야 하니 아이러니였다. 운명이려니 하고 성심껏 국군들의 노고를 덜어주고자 애썼다. 일제시대를 배경으로 한 '태극기'라는 대본을 직접 쓰고 주연 배우로 나섰다. 가는 곳마다 국군 병사들의 열광적인 박수를 받았다. 나라를 위해 기여했다는 생각에 뿌듯했다.

하루는 헌병대에서 내가 북측에 부역한 것을 조사하겠다며 불렀다. 헌병대원은 잔뜩 겁먹은 나를 한적한 민가로 데려갔다. 술상 앞에 헌병대장이 앉아있었다. 그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얼굴만 반반한 줄 알았더니 피부도 곱구먼"이라며 다가왔다. 그를 확 밀어젖혔다. 하지만 그는 씩씩거리며 권총을 겨누더니, 내 몸 위로 쓰러졌다. 발버둥을 치고 비명을 질렀지만 도와줄 사람은 없었다. 한겨울에 숙소로 돌아오면서 한없이 흐느껴 울었다.

이후 중공군에 밀려 국군이 퇴각하자 그제야 서울로 돌아올 수 있었다. 납북됐다가 살아 돌아오니 "최은희가 인민군들에게 몹쓸 짓을 당했다"는 등 별의별 소문이 돌았다. 하지만 정작 나를 욕보인 사람은 아군이었다.

마릴린 먼로와 함께… 1954년 2월 주한미군 위문 공연차 대구 동촌비행장에 도착한 미국 영화배우 마릴린 먼로(오른쪽)가 환영행사에서 최은희씨와 활짝 웃고 있는 모습. 군복을 입은 먼로가 한복을 입은 최씨의 팔짱을 끼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최은희씨 제공
전쟁 후 또 한번 납북되며 영화처럼 살아

서울에 돌아온 기쁨은 잠시, 1·4후퇴에 따라 대구를 거쳐 부산에 내려갔다. 지인의 소개로 부산 광복동 한 다방에서 일했다. 당대의 배우였지만, 피란지에서 먹고살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 그러다 극단 '신협'의 이해랑씨로부터 연극을 해보자는 연락이 왔다. 신협 단원들과 함께 1951~53년 부산·마산·대구 등을 돌며 연극활동을 했고,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전쟁을 겪으며 나는 강해졌다. 전쟁 이전에 순한 처녀였다면, 이후엔 대담하고 강해졌다. 나를 자주 폭행하던 첫 남편과 헤어지고, 1954년 신상옥 감독과 결혼했다. 이후론 쭉 영화에만 몰두하며 살았다.

그러나 1978년 홍콩에서 다시 납북되면서, 또 한번 운명의 소용돌이에 말려들었다. 북한에서 김정일 지시로 영화를 만들다 1986년 오스트리아 에서 미국대사관을 통해 극적으로 탈출했다. 하지만 곧바로 국내에 들어오지 못하고 미국에서 망명 생활을 하다 1999년에야 영구귀국했다.

다른 이의 삶을 연기하는 영화배우로 살았지만, 내가 살아온 길 자체가 한 편의 영화가 됐다. 나는 분단국가의 유명 배우라는 이유로 인생의 전환기마다 타의에 의해 고난을 겪어야 했다. 얼마 남지 않은 여생은 2006년 세상을 떠난 남편 신상옥 감독을 추모하는 일에 전념하면서 내 뜻대로 살고 싶다.

 [미니 戰史]

[15] 평양탈환 작전… "국군이 먼저 평양 점령하라" 李대통령 밀명… 제1사단, 美軍보다 하루 먼저 대동강 건너

  • 손규석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
 
평양은 한반도 북부의 대표적인 도시로 전쟁 당시 인구는 약 50만명 정도였다. 도시를 북서와 남동으로 가르는 대동강을 기준으로 본평양과 동평양으로 구분됐다. 양쪽을 연결하는 교량은 인도교인 대동교와 복선화된 대동강 철교였다.

국군과 유엔군의 평양 탈환 작전은 성패(成敗)의 문제라기보다는 누가 먼저 입성하느냐하는 '선착순'의 문제였고 치열한 경쟁이 벌어졌다.

북한군은 제17사단과 제32사단 잔류병 약 8000명으로 평양방위사령부를 급조했지만, 이들의 임무는 평양 방어라기보다는 주요기관과 부대의 철수 시간을 버는 것이었다.

평양탈환을 책임진 미 제1군단장 밀번 소장은 처음엔 기동력을 고려해 미 제1기병사단과 제24사단에 각각 주공(主攻)·조공(助攻) 임무를 부여했다. 국군 제1사단은 후방작전을 맡도록 했다. 그러자 백선엽 국군 제1사단장이 밀번 군단장에게 국군도 평양 탈환에 동참할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요청했다. 그 결과, 국군 제1사단이 미 제24사단의 조공 역할을 맡게 됐다.

미군의 북진은 파죽지세였다. 1950년 10월 12일 미 제1기병사단은 금천에서 북한군 2개 사단을 격퇴한 뒤, 서흥(16일)-사리원(우회)-황주(17일)-평양 남측 흑교리(18일)를 거쳐 19일에는 대동강 남쪽에 도착했다.

이에 질세라 우측에 있던 국군 제1사단도 11일 아침 고량포에서 38선을 넘은 이후, 중·서부 험한 산길을 따라 최단거리로 진격을 했다.

한편 이승만 대통령이 10월 17일 정일권 총사령관에게 "평양만큼은 국군이 먼저 점령하라"고 밀명을 내림에 따라 국군 제7사단도 평양 진출 경쟁에 합류했다.

국군과 미군은 대동강을 건너는 데서 결정적으로 갈렸다. 미군은 유속이 빠르고 깊은 대동강을 만나게 되자 20일 아침이 돼서야 부교를 가설하는 등 본격적인 도하를 감행한 반면, 국군은 하루빨리 강을 건넜다. 국군 제1사단 15연대는 미군의 도하 장비가 도착하기 전인 19일 밤에 대동강 도하를 감행했으며, 이 무렵 제7사단 8연대도 강을 건넜다.

평양시내에서는 10월 30일까지 잔적소탕작전이 전개됐고, 작전 완료와 함께 이승만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평양시청에서 입성환영식이 성대하게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