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팔봉 김기진 아들 김용한씨 '17세에 장교 임관'
문인이었던 아버지, 인민재판서 얻어맞고 버려졌으나… 극적으로 살아 돌아와
- ▲ 1953년 육군 포병 대위 시절 김용한씨.
1950년 7월 1일 밤. 서울 을지로 3가 우리 집에 장총을 가진 청년 2명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아버지를 어디론가 끌고 갔다. 내 아버지는 소설가 팔봉(八峰) 김기진. 1920~30년대 백조·토월회 등 동인지에서 활약한 유명 문인(文人)이었다. 2~3일이 지나도 아버지가 돌아오시지 않자 덜컥 겁이 났다. 큰형님과 둘이서 서울대병원, 세브란스병원 등에 산적된 시신 더미를 뒤졌다. 하지만 허사였다.
절망에 빠진 채 일주일쯤 지났을까. 피투성이가 된 아버지가 비틀비틀 걸어오시는 게 아닌가. 우린 유령을 본 게 아닌가 했다. 기운을 차린 아버지는 공포의 일주일을 이야기하셨다. 아버지는 '애지사(愛智社)'라는 인쇄소를 경영했는데 직공 2명이 아버지를 "월급을 착취한 자본가"라며 고발했다는 것이다. 공산당은 서울시청 앞에서 "인민의 적"이라며 아버지를 인민재판에 회부했다. 결과는 사형. 청년 서너명이 곤봉으로 사정없이 때렸다. 아버지는 머리에서 피를 낭자하게 흘리며 쓰러졌다. 그들은 아버지가 죽은 것으로 판단하고 을지로·종로 일대를 끌고 다녔다.
서울의 한 경찰서 뒷마당에 시신들과 엉켜 있던 아버지는 극적으로 의식을 되찾아 귀가했다. 공산당은 아버지가 일본강점기에 카프(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 발기인이었다가 이후 노선을 달리했다는 점에서 괘씸죄를 적용했다고 한다. 나는 공산당에 복수를 결심했다.
◆만 17세에 임관해 '베이비 장교'로 통해
그해 9월 28일 서울이 수복된 이후 만 17세 이상이면 징집 대상이 됐다. 휘문중학교 5학년(현재 고2)으로 17세이던 나는 자원입대를 결심했다. 그리고 기왕이면 장교로 위풍당당하게 가고 싶었다. 아버지도 "잘 생각했다. 어리더라도 당당한 군인이 되라"고 격려해주셨다.
- ▲ 1962년 초 박정희(왼쪽)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소설가 팔봉(八峰) 김기진의 서울 수유동 집에 찾아왔을 때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모습. 김기진은 6·25 전쟁 때 인민재판을 받았다가 극적으로 살아난 후 육군 종군작가단 부단장을 맡아 반공(反共) 활동을 했다. /김용한씨 제공
1950년 12월 18일 나를 포함해 동기 40명이 부산 동래에 있는 육군종합학교에 입교했다. 40명 중 두 번째로 어렸다. 강추위 속에 4~5세 많은 동기들과 함께 훈련을 받았다. 이듬해 3월 육군 2사단 포병대 소속 관측장교(소위)로 임관, 주로 강원도 일대에서 싸우게 됐다. 만 17세에 장교…. 지금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포대장 이하 사병까지 60명가량의 장병 중에 나보다 어린 사람이 거의 없었다. 특히 특무상사, 일등상사들은 6~10세씩 많아 껄끄러웠다. 그들은 내 명령을 겉으론 존중했지만 자기들끼리는 나를 "베이비 장교"라고 불렀다. 사병들은 보통 2~3세씩 많았지만 내게 즉결처분권이 있어 함부로 행동하지는 못했다. 내 지시를 어긴 사병들은 뺨을 때리기도 하는 등 나이를 떠나 장교 노릇을 제대로 하려고 노력했다.
그래도 어려서 그랬는지 스트레스가 이만저만 아니었다. 매일 한 갑씩 화랑 담배를 피워댔다. 비 올 때면 화랑 위스키라는 보급 술을 마셨는데, 주질(酒質)이 조악해 마시고 토하기를 반복했다. 미성년자가 군인이랍시고 술·담배를 하는 꼴이다.
우리는 강원도 금화·철원 일대에서 벌어진 '철의 삼각지대 전투'에 참가했다.혈투는 밤낮으로 계속됐고 사상자는 속출했다. 우리 포대 관측장교 6명 중 2명은 '빽'을 써서 후방으로 빠졌다. 나는 장교 중 가장 어렸지만 끝까지 버텼다. 여러 차례 적군 벙커를 명중시켜 화랑무공훈장도 받았다.
죽을 고비도 있었다. 교대를 하려고 고지에서 하산 준비를 하는데 바로 옆에서 고막을 찢는 포탄 소리가 났다. 병사 4~5명이 소리도 못 지르고 죽었다. 내 옆에 있던 병사가 급하게 적군에게 박격포를 쏘려다 포탄이 터진 것이다.
산꼭대기에서 매일 대포, 예광탄 등의 폭격 소리를 듣다가 후방에 와보니 한동안 머리가 마비되는 느낌이 들고 잠을 잘 수 없어 고통스러웠다. 장기간 총격전에 노출된 병사들에게 발생하는 '포탄충격증후군'(Shell Shock Syndrome)이었다.
전쟁 경험은 인생 진로를 바꿔놓았다. 1955년 8월 대위로 예편하고 고교로 돌아가려니 뜻대로 되지 않았다. 1년을 더 다녀야 한다는 것이다. 22세 나이로 후배들과 학교를 다닐 순 없는 노릇이었다. 생리학이나 생물학 분야 학자가 되겠다는 어릴 적 꿈을 포기해야 했다.
고민 끝에 미국으로 건너갔다. 미국 오클라호마주 필립스대학에 입학했고, 심리학을 전공했다. 전쟁 중 사람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갖게 됐고, 인간의 마음을 탐구해보고 싶었다. 석사과정은 뉴욕 컬럼비아대에서 마쳤다. 귀국해서 마케팅과 시장조사 분야에서 일했고, AC닐슨 코리아 사장과 한국마케팅여론조사협회 초대회장을 지냈다.
아버지도 인민재판 후유증을 극복하시고 신문사 주필·예술원 회원 등을 역임하시며 활발한 사회활동을 하시다 1985년 82세로 돌아가셨다. 어린 나이에 나라를 위해 4년 8개월간 몸바친 기간은 내게 가장 소중한 자랑거리이다.